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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달빛과 촛불

윤정의 일상 2008. 7. 13. 18:40

달빛과 촛불


                                                        김 태 희(다산연구소 기획실장)

정조의 이름은 ‘이산’이 아니라 ‘이성’이란다. 한자로 ‘보일 시(示)’ 둘이 나란히 결합된 이 글자는 ‘산’이라 읽기도 하지만, 정조의 지시로 편찬한 책에 따르면 ‘성(省)’이란 뜻으로 ‘성’이라 읽는 게 맞다고 한다(다산연구소 <실학산책> 6월11일자 참조). ‘살피다’는 뜻의 글자가 정조의 이미지에 어울린다.

정조는 또 서재에 글자 ‘홍(弘)’을 붙여놓고 ‘홍재(弘齋)’를 호로 삼았다. ‘홍’은 <논어>에서 따온 것이다. “선비는 뜻이 크고[弘] 굳세지[毅] 않으면 안 된다.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어진 정치, 좋은 정치를 베푸는 무거운 임무를 맡기 위해서는 뜻이 크고 굳세야 한다. 정조는 막중한 군주의 책임을 스스로 다짐한 것이다.

좋은 정치의 큰 뜻, 온 하천을 비추는 밝은 달

조선중기 이후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립 속에, 신하들은 곧잘 왕을 가르치고 압박했다. 당면 문제에 해결책을 내놓는 대신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해 왕의 도덕적 수양만을 요구했다. 왕의 전제권력을 제한했지만 민생을 책임지지는 않았다. 자기네들끼리의 편협한 이념논쟁에 바빴다. 학문에 힘쓴 정조는 학자군주로서 신하들을 가르칠 정도였다. 그의 왕권강화책은 백성의 이익을 옹호했다.

정조는 재위 22년(1798)에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불렀다. ‘많은 하천을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절대왕정 프랑스의 루이14세가 태양왕을 자처한 것과 비교된다. 태양은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시지만, 밝은 달은 친근한 느낌으로 만천하를 은은하게 밝혀 준다. 달빛의 비유는 다분히 철학적인데 정조의 군주로서의 담대한 포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내하고 개방적이었던 정조가 이즈음에는 군주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며 신하들을 압박했다. 대부분 신하들은 침묵으로 버티고 정조는 고립되었다. 재위 24년(1800) 정조는 갑자기 세상을 떴다. 왕권을 강화하려던 노력은 견제장치를 약화시켜 결과적으로 무책임한 세도정치에 일조했다. 밝은 달을 자처한 정조가 사라진 후 어둠은 더욱 깊었다.

밝은 달 같은 영명한 지도자를 간절히 기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 5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론 없이 대왕이라 칭할 만한 임금은 세종과 정조, 두 분 정도에 그친다. 민주주의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훌륭한 지도자를 얻기란 쉽지 않음을 우리는 보았다.

200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 사회는 밝은 달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수많은 촛불들이 광장을 밝혔다. 촛불은 달빛이 없어도 어둠을 밝힐 수 있다. 촛불은 바람에 흔들리고 하나만으론 미약하지만, 수많은 촛불들이 모이면 달라진다. 촛불은 또다른 은유인 횃불과 달리 비폭력적이고 차분하다. 평화롭고 겸허한 소망을 상징한다.

최근 ‘촛불정국’에서 민주주의의 최후의 수호자인 국민의 직접행동과 생활정치의 모습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그 배경은 안타깝기 짝이 없는 것이다. 새 정권에 대한 실망의 표출이고, 정치의 부재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새 정권은 출범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그간 누적된 실책으로 실망과 불신을 쌓아왔다. 무릇 일은 조짐이 있기 마련인데, ‘전봇대 뽑기’가 그게 아니었나 싶다. 대통령 당선인의 말 한 마디에 궂은 날씨의 위험한 공사로 어떤(?) 전봇대가 뽑혔다. 그곳에 왜 전봇대가 있었는지 본질적 원인파악이나 근본적 해결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봇대 뽑기’는 탁상행정, 졸속행정, 전시행정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주류언론은 환호했고, 규제철폐의 이미지로 부각시켰다.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고 성과를 내고 싶겠지만, 시간을 갖고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철저하게 살피는 집요함과,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고 동의를 얻으려는 자세가 아쉽다.

어렵지만, 수많은 촛불을 밝힐 수 있기에

혹자는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한다. 대의제를 제도적 원칙으로 택한 것은, 현대 국가에서 직접민주주의를 기술적으로 실현하기 어렵고, 정치 전문가가 대표로서 담당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데에 있다. 그런데 최근 ‘촛불정국’에서, 여러 기술적 발전으로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이 그만큼 커졌다는 점과, 대표들의 정치적 능력이 기대미달이라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대표는 선거를 통해 위임받고 책임진다. 그런데 차선도 아닌 차악의 투표를 강요하는 선거에서 제대로 된 위임과 책임이란 당초부터 어려워진다. 결국 현존 정당의 문제점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복잡다단한 국민적 요구를 반영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구성하고, 복잡미묘한 현안을 해결할 능력 내지 인재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계속 고민할 과제이다. 통신기술 발달로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가 출현하고 이에 따라 기존 제도언론의 위상과 기능이 바뀔 수밖에 없는 언론 상황은, 정치 분야에도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 최근의 새로운 경험을 토대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여지가 더 많이 생겼다.

우리 민주공동체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민주화 20년의 미흡함과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10년의 결과를 곱씹어 반성하는 데서 출발해야겠다. 우리 민주공동체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여전히 학습중이다. 그래도 언제든 밝힐 수 있는 수많은 촛불들이 있기에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는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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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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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희망과 행복이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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