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용도 방

[스크랩] 방랑시인 김삿갓 시와/할아버지 김익순/..시인이 백일장서 장원 급제 등등.

윤정의 일상 2008. 8. 23. 12:11
방랑시인 김삿갓




-훈장을 훈계하다-

두메산골 완고한 백성이 괴팍한 버릇 있어
문장대가들에게 온갖 불평을 떠벌리네.
종지 그릇으로 바닷물을 담으면 물이라 할 수 없으니
소 귀에 경 읽기인데 어찌 글을 깨달으랴.
너는 산골 쥐새끼라서 기장이나 먹지만
나는 날아 오르는 용이라서 붓끝으로 구름을 일으키네.
네 잘못이 매 맞아 죽을 죄이지만 잠시 용서하노니
다시는 어른 앞에서 버릇없이 말장난 말라.

訓戒訓長 훈계훈장
化外頑氓怪習餘 文章大塊不平噓 화외완맹괴습여 문장대괴불평허
여盃測海難爲水 牛耳誦經豈悟書 여배측해난위수 우이송경기오서
含黍山間奸鼠爾 凌雲筆下躍龍余 함서산간간서이 능운필하약용여
罪當笞死姑舍己 敢向尊前語詰거 죄당태사고사기 감향존전어힐거

*김삿갓이 강원도 어느 서당을 찾아가니 마침 훈장은 학동들에게 고대의 문장을 강의하고 있는데
주제넘게도 그 문장을 천시하는 말을 하고 김삿갓을 보자 멸시를 하는 것이었다. 이에 훈장의 허세를 꼬집는 시를 지었다.






방랑시인 김삿갓 [본명:김병연]



1807(순조 7)∼1863(철종 14).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본관은 안동. 자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경기도 양주 출생.

평안도 선천(宣川)의 부사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에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다. 노복 김성수 (金聖洙)의 구원으로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해 공부하였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안근(安根)은 홧병으로 죽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기고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김병연이 과거에 응시,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그의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둔 채로 방랑의 길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각지의 서당을 주로 순방하고, 4년 뒤에 일단 귀향하여 1년 남짓 묵었다. 이때 둘째아들 익균(翼均)을 낳았다. 또다시 고향을 떠나서 서울·충청도·경상도로 돌았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해동안 훈장노릇도 하였다. 다시 전라도·충청도·평안도를 거쳐 어릴 때 자라던 곡산의 김성수 아들집에서 1년쯤 훈장노릇을 하였다.



충청도 계룡산 밑에서, 찾아온 아들 익균을 만나 재워놓고 도망하였다가 1년 만에 또 찾아온 그 아들과 경상도 어느 산촌에서 만났으나, 이번에는 심부름을 보내놓고 도망쳤다. 3년 뒤 경상도 진주땅에서 또다시 아들을 만나 귀향을 마음먹었다가 또 변심하여 이번에는 용변을 핑계로 도피하였다.

57세 때 전라도 동복(同福)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신세를 졌다. 그 뒤에 지리산을 두루 살펴보고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한많은 생애를 마쳤다. 뒤에 익균이 유해를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김병연의 한시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어 희화적(戱怜的)으로 한시에 파격적 요인이 되었다. 그 파격적인 양상을 한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스무나무 아래 앉은 설운 나그네에게/망할놈의 마을에선 쉰밥을 주더라/인간에 이런 일이 어찌 있는가/내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느니만 못하다(二十樹下三十客 四十村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이 시에서 전통적인 한시의 신성함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 그 양식 파괴 등에서 이러한 파격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문학사에서는 ‘김삿갓’으로 칭해지는 인물이 김병연 외에도 여럿 있었음을 들어 김삿갓의 이러한 복수성은 당시 사회의 몰락한 양반계층의 편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과거제도의 문란으로 인하여 선비들의 시 창작기술은 이와 같은 절망적 파격과 조롱·야유·기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1978년 김병연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광주 무등산 기슭에 시비(詩碑)를 세웠다. 1987년 영월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全國詩歌碑建立同好會)’에서 시비를 세웠다. 그의 시를 묶은 ≪김립시집 金笠詩集≫이 있다.

≪참고문헌≫ 綠北集(黃五), 海藏集, 大東奇聞, 金笠詩集(李應洙編, 有吉書店, 1939), 金笠의 詩와 諷刺精神(金容浩, 漢陽 3권 7호, 1964), 金笠硏究(尹銀根, 고려대학교교육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79).(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삿갓의 사상

김삿갓의 방랑 생활은 출발 동기부터 불평객과 반항아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것은 그가 가명(假名)을 김란이라 하고 난고(蘭皐) 외에 이명(而鳴)이라는 호(號)로 불리고 머리에 삿갓을 쓴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명(而鳴)은 중국 서적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있는 불평이명(不平而鳴)이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불평과 반항은 계급적 몰락에서 오는 개인적 입장에서 시작되었으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폭넓은 사회 경험을 함에 따라 세계관과 사회관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즉 조선 왕조에 대해 은근히 반대의 감정을 표시한 것은 물론 봉건 질서와 제도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빈부의 차가 심한 사회적 불합리를 저주하고 양반 귀족들의 죄악과 불의, 거만, 허식을 증오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중년을 넘으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그의 사상에 이러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폐족이라는 계급적 지위, 종의 집에서 자라난 유년 시기의 성장 과정, 또는 일생의 방랑 생활이 말해주는 불우한 사회적 처지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 그가 살던 조선 말기의 사회 환경과 시대 특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행한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을 표시하고 만인이 갈망하는 벼슬을 포기함과 동시에 당시 봉건 질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그 사상과 태도 속에는 멸망과 붕괴에 직면한 민중들과 사회의 시대적 기운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상에서 가장 중심적인 경향은 강한 의분과 정의감에 기초한 반항 정신과 풍자 정신이었으며 인도주의로 받침되는 평민 사상이었다. 이 외에 자유분방함, 노골적인 연애 감정, 낙천성과 풍부한 유머, 개개 사물에 대한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관심 등의 경향도 있으나 그것은 부차적인 의의를 가지거나 중심 사상의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그의 사상과 결부하여 몇 가지 특징을 말한다면

첫째, 이러한 사상 경향의 심도와 강도가 매우 철저하고 강렬했다.

일생 동안 방랑 생활을 하는 중 그의 아들이 세 번이나 찾아와서 귀가를 간청하였으나 끝까지 돌아가지 않은 점, 모친이 계신 외가가 있는 마을을 지날 때는 들러서 직접 만나지는 않고 산에 올라가 나무하러 온 아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갔다는 이야기, 친구 정현덕의 주선으로 왕의 사면을 받고 벼슬 받을 기회를 거절했다는 사실 등에서 그러한 특성을 볼 수 있다.

둘째, 사상 경향의 표현 방법과 형태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였다.

우선 방랑 생활 자체가 불평과 반항의 한 표현이었다. 그 이전의 많은 반항아들 역시 이 방법을 취했으니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일생을 방랑객으로 지냈고 봉건 체제에 반항했던 허균(許筠)도 강원도, 경기도 등을 방랑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기이하고 광적(狂的)인 행동도 반항적 태도의 한 표현이었다.

황오(黃五)의 녹차집(綠此集)에는 '하루는 정현덕이 내게 편지를 보내 오기를 천하 기남자(奇男子)가 여기 있는데 한번 가 보지 않겠는가 하기에 같이 가 보니 과연 김삿갓이더라. 사람됨이 술을 좋아하고 광분하여 익살을 즐기며 시를 잘 짓고 취하면 가끔 통곡하면서도 평생 벼슬을 하지 않으니 과연 기인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석우는 해장집(海藏集)에서 '과거장에 들어가되 어떤 때는 수십 편을 짓고 나오고 어떤 때는 한편도 안 짓고 나오니 그 광태가 이와 같더라....과거장 밖의 술집에서도 그의 이름을 사랑하나 그 광태를 무서워하여 술을 모조리 먹어도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그의 기행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또 상대방을 공격할 때는 큰소리로 웃어주기도 하고 풍자와 재담으로 비꼬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취하였다. 이것은 일반 대중이 그와 그의 예술을 사랑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일부 양반들도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한편 즐겨 쓴 삿갓 역시 변형된 투쟁 무기였으니 보기 싫은 당시 사회와 세상에 대한 불평 불만의 사상적 표현이었다. 김삿갓은 조부를 탄핵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죄인이라기 보다는 봉건적인 지배 계급에 대한 반항아라는 사회 정치적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출처 : 김삿갓 풍자시 전집, 실천문학사 발행)






[漢詩)] 방랑 시인 김삿갓의 유명한 일화.


언제나 그렇듯 갓쓴 선비네들은

정자에 앉아 옆에 계집을 꿰어차고는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삿갓을 쓴 행인이 그들의 틈에 끼더니

시를 쓸테니 술대접을 해 달라고 부탁했대요.

양반네들이 열이 채서 그 행인을 쫓으려고 했지만

한 양반이 호감을 느끼고는

선비들을 말려서 그 삿갓쓴 행인에게 시를 지어보게 했어요.

그 행인은 정자에 앉자말자 과제를 내라 했습니다.

너무 당당한 모습에 당황한 양반들.

양반들은 꾀를 내어 자신들의 이름을 이용해 시를 지으라 했지요.

그 양반들은 자신의 이름을 밝혔습니다.

'원 생원, 문 첨지, 서 진사, 조 석사'



그 말을 듣자 말자 대뜸 종이위에 휘갈겨 쓴 그 삿갓나그네는

종이를 내어 놓고는 술을 단숨에 들이키곤

길을 떠났습니다.....



그 선비들이 삿갓쓴 나그네가 지은 시가 궁금해서 종이를 봤는데

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日出猿生員 (일출원생원) -> 해뜨자 원숭이 들에 나오고
黃昏蚊添至 (황혼문첨지) -> 날 저무니 모기들 처마에 모여드네.
猫過鼠盡死 (묘과서진사) -> 고양이 지나자 쥐는 모조리 죽고,
夜出蚤席射 (야출조석사) -> 밤 들자 벼룩은 자리에 나와 쏘네.



원생원을 원숭이로. 문첨지를 모기로.

서진사를 쥐로. 조석사는 벼룩으로....



김병연. 아니, 희대의 방랑시인 김삿갓은

그렇게 틀에박힌 양반들의 허위의식과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며

팔도강산을 떠돌았습니다......














기생 가련에게




가련한 행색의 가련한 몸이

가련의 문 앞에 가련을 찾아왔네.

가련한 이 내 뜻을 가련에게 전하면

가련이 이 가련한 마음을 알아주겠지.





可憐妓詩 가련기시

可憐行色可憐身 可憐門前訪可憐 가련행색가련신 가련문전방가련

可憐此意傳可憐 可憐能知可憐心 가련차의전가련 가련능지가련심







*김삿갓은 함경도 단천에서 한 선비의 호의로 서당을 차리고 3년여를 머무는데 가련은 이 때 만난 기생의 딸이다.

그의 나이 스물 셋. 힘든 방랑길에서 모처럼 갖게 되는 안정된 생활과 아름다운 젊은 여인과의 사랑,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방랑벽은 막을 수 없었으니 다시 삿갓을 쓰고 정처없는 나그네 길을 떠난다.




이별







가련의 문 앞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가련한 나그네의 행색이 더욱 가련하구나.

가련아, 가련한 이 몸 떠나감을 슬퍼하지 말라.

가련을 잊지 않고 가련에게 다시 오리니.




離別 이별

可憐門前別可憐 可憐行客尤可憐 가련문전별가련 가련행객우가련

可憐莫惜可憐去 可憐不忘歸可憐 가련막석가련거 가련불망귀가련





스스로 탄식하다

슬프다 천지간 남자들이여
내 평생을 알아줄 자가 누가 있으랴.
부평초 물결 따라 삼천리 자취가 어지럽고
거문고와 책으로 보낸 사십 년도 모두가 헛것일세.
청운은 힘으로 이루기 어려워 바라지 않았거니와
백발도 정한 이치이니 슬퍼하지 않으리라.
고향길 가던 꿈꾸다 놀라서 깨어 앉으니
삼경에 남쪽 지방 새 울음만 남쪽 가지에서 들리네.

自嘆 자탄
嗟乎天地間男兒 知我平生者有誰 차호천지간남아 지아평생자유수
萍水三千里浪跡 琴書四十年虛詞 평수삼천리랑적 금서사십년허사
靑雲難力致非願 白髮惟公道不悲 청운난력치비원 백발유공도불비
驚罷還鄕夢起坐 三更越鳥聲南枝 경파환향몽기좌 삼경월조성남지

*월조(越鳥)는 남쪽 지방의 새인데 다른 지방에 가서도 고향을 그리며 남쪽 가지에 앉는다고 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어느 집 앞을 지나는데, 그 집 아낙이 설거지물을 밖으로 휙~ 뿌린다는 것이 그만 '김삿갓'에게 쏟아졌다. 구정물을 지나가던 객(客)이 뒤집어썼으니 당연히 사과를 해야 마땅하지만, '삿갓'의 행색이 워낙 초라해 보이는지라 이 아낙은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그냥 돌아선다.

그래서 '삿갓'이 등 뒤에 대고 한마디 욕을 했다. 하지만 암만 그래도 상스런 욕을 할 수는 없어서 단 두 마디를 했다. "해. 해."

이게 무슨 욕인가? 그러나 잘 풀어보면 해=年이니까 "해. 해." 그러면 '년(年)'자(字)가 2개니까 2年(=이 년!)이던지 아니면 두 번 연속이니까 쌍(雙), 곧 '雙年'이 될 것이다.



지난 번 칼럼에서 한글로 회문시를 지어보자고 제의했지만 적어도 김삿갓이 회문시를 지으려 했으면 몇 수 십 개는 지었을 것이다.

그에 관한 일화나 유머와 재치, 해학에 가득 찬 멋진 시가 어디 한 두 개인가? 한 농부의 처가 죽어 그에게 부고를 써달라고 하자 '유유화화(柳柳花花)'라고 써주었다는 얘기는 국민들이 외울 정도이다.

'버들버들하다가 꼿꼿해졌다'는 뜻이 아닌가? 이처럼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표현하기도 하며 한시를 한글의 음을 빌어 멋지게 풍자하고 조롱하는 그의 솜씨는 우리나라 고대문학사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죽시 竹詩>이다. 그 시의 첫머리는 이렇다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이것을 옛 한시대로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어떤 뜻이 되나? "이 대나무 저 대나무 되어가는 대나무, 바람이 치는 대나무, 물결이 치는 대나무"이다. 제법 그럴 듯 한 것 같은데 사실은 해석이 틀렸다. 이 시의 비결은 대죽(竹)에 있다. 여기서 김삿갓은 대를 대나무가 아니라 "...대로"의 '대'로 썼다. 그렇게 해서 다시 이 시의 첫 구절을 다시 읽어보면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가 된다.

엄격한 정형이 있는 한시가 아니라 우리말의 시조를 흉내낸 멋진 한시가 된다.

말하자면 시조를 한자의 운에 맞추어 부른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시 전체를 보면



此竹彼竹化去竹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風打之竹浪打竹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飯飯竹竹生此竹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지만

是是非非付彼竹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고 제대로 붙이세

賓客接待家勢竹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市井賣買歲月竹 -시장에서 사고 파는 것은 시세대로

萬事不如吾心竹 -만사는 내 마음대로 함만 같지 못하니

然然然世過然竹 -그렇고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지내세


가 된다.



또 그 유명한 구월산이란 시는 어떤가?


昨年九月過九月- 작년에는 구월에 구월산을 넘었는데

今年九月過九月- 금년에는 구월에 구월산을 넘는구나

年年九月過九月- 해마다 구월에 구월산을 넘으니

九月山光長九月- 구월산 경치는 언제나 구월이로다.


김삿갓의 해학 가운데 비교적 많이 알려진 것이 "스무 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로 시작하는 <이십수하(二十樹下)>라는 시이다.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시에서 二十은 스무이고, 三十은 서러운 또는 설은이고, 四十은 마흔, 곧 망한, 망할을 뜻한다. 五十은 쉰, 七十은 일흔, 곧 이런이 된다.

그런데 <이십수하>라는 시 제목을 잘 보면 상당히 심한 욕임을 알 수 있다. '수'를 나무 또는 놈 등 훈으로 읽으면 '수하'는 '놈아'가 된다.

이십은 경음으로 읽으면 욕을 음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점잖게 해석하면


스무 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

망할 놈의 집에서 쉰 밥을 먹는구나,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차라리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으리.

로 되는데, 스무 나무라는 말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심한 상소리 욕이기에 그냥 이렇게 점잖게 표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인구에 회자되는 시,

는 뜻으로 풀면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와보니/방 안에 모두 귀한 분들일세/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 되고/선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생은 와서 뵙지도 않네"가 되지만 한자음을 그대로 읽는 경우 그 발음이 뜻하는 바는 익히 발음 그대로이다.








詩 : 무제(無題)



四脚松盤粥一器 사각송반죽일기

天光雲影共排徊 천광운영공배회

主人莫道無顔色 주인막도무안색

吾愛靑山倒水來 오애청산도수래



네 다리 소반 위에 멀건 죽 한 그릇.

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가 그 속에서 함께 떠도네.

주인이여, 면목이 없다고 말하지 마오.

물 속에 비치는 청산을 내 좋아한다오


김삿갓의 묘


난고평생시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건만
내 평생을 돌아보니 너무나 가슴 아파라.
짚신에 대지팡이로 천 리 길 다니며
물처럼 구름처럼 사방을 내 집으로 여겼지.
남을 탓할 수도 없고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어
섣달 그믐엔 서글픈 마음이 가슴에 넘쳤지.
초년엔 즐거운 세상 만났다 생각하고
한양이 내 생장한 고향인 줄 알았지.
집안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꽃 피는 장안 명승지에 집이 있었지.
이웃 사람들이 아들 낳았다 축하하고
조만간 출세하기를 기대했었지.
머리가 차츰 자라며 팔자가 기박해져
뽕나무밭이 변해 바다가 되더니,
의지할 친척도 없이 세상 인심 박해지고
부모 상까지 마치자 집안이 쓸쓸해졌네.
남산 새벽 종소리 들으며 신끈을 맨 뒤에
동방 풍토를 돌아다니며 시름으로 가득 찼네.
마음은 아직 타향에서 고향 그리는 여우 같건만
울타리에 뿔 박은 양처럼 형세가 궁박해졌네.
남녘 지방은 옛부터 나그네가 많았다지만
부평초처럼 떠도는 신세가 몇 년이나 되었던가.
머리 굽실거리는 행세가 어찌 내 본래 버릇이랴만
입 놀리며 살 길 찾는 솜씨만 가득 늘었네.
이 가운데 세월을 차츰 잊어 버려
삼각산 푸른 모습이 아득하기만 해라.
강산 떠돌며 구걸한 집이 천만이나 되었건만
풍월시인 행장은 빈 자루 하나뿐일세.
천금 자제와 만석군 부자
후하고 박한 가풍을 고루 맛보았지.
신세가 궁박해져 늘 백안시 당하고
세월이 갈수록 머리 희어져 가슴 아프네.
돌아갈래도 어렵지만 그만둘래도 어려워
중도에 서서 며칠 동안 방황하네.

蘭皐平生詩 난고평생시
鳥巢獸穴皆有居 顧我平生獨自傷 조소수혈개유거 고아평생독자상
芒鞋竹杖路千里 水性雲心家四方 망혜죽장로천리 수성운심가사방
尤人不可怨天難 歲暮悲懷餘寸腸 우인불가원천난 세모비회여촌장
初年自謂得樂地 漢北知吾生長鄕 초년자위득락지 한북지오생장향
簪纓先世富貴人 花柳長安名勝庄 잠영선세부귀인 화류장안명승장
隣人也賀弄璋慶 早晩前期冠蓋場 인인야하농장경 조만전기관개장
髮毛稍長命漸奇 灰劫殘門飜海桑 발모초장명점기 회겁잔문번해상
依無親戚世情薄 哭盡爺孃家事荒 의무친척세정박 곡진야양가사황
終南曉鍾一納履 風土東邦心細量 종남효종일납리 풍토동방심세양
心猶異域首丘狐 勢亦窮途觸藩羊 심유이역수구호 세역궁도촉번양
南州從古過客多 轉蓬浮萍經幾霜 남주종고과객다 전봉부평경기상
搖頭行勢豈本習 口圖生惟所長 요두행세기본습 구도생유소장
光陰漸向此中失 三角靑山何渺茫 광음점향차중실 삼각청산하묘망
江山乞號慣千門 風月行裝空一囊 강산걸호관천문 풍월행장공일낭
千金之子萬石君 厚薄家風均試嘗 천금지자만석군 후박가풍균시상
身窮每遇俗眼白 歲去偏傷빈髮蒼 신궁매우속안백 세거편상빈발창
歸兮亦難佇亦難 幾日彷徨中路傍 귀혜역난저역난 기일방황중로방

*난고는 김삿갓의 호이다.













김삿갓이 다녀간 금곡사

내 용 | 금곡사 ▽ 방랑시인 김삿갓도 머므른 금곡사 강진읍에서 작천면으로 넘어가는 까치내재에 오른다 보면...석가세존진신사리 32과가 발견되어 세상의 이목이 집중됐다. 금곡사에는 김삿갓 시인의 시비가 있으며 신경통에 특효가 있다는 금곡사 계곡의 물이 사철





書堂은乃早知 : 서당은 이미 알고 찾아 왔는데

生徒는諸未十 : 생도 수는 열명도 않되는구나

房中은皆尊物 : 방안에 있는 작자들은 다 유식한체만 하고

先生은來不謁 : 선생은 손님이 왔어도 나와서 인사조차 않는구나.



(김삿갓이 서당을 �아는데 에서)





안락성을 지나다가 배척받고

안락성 안에 날이 저무는데
관서지방 못난 것들이 시 짓는다고 우쭐대네.
마을 인심이 나그네를 싫어해 밥 짓기는 미루면서
주막 풍속도 야박해 돈부터 달라네.
빈 배에선 자주 천둥 소리가 들리는데
뚫릴 대로 뚫린 창문으로 냉기만 스며드네.
아침이 되어서야 강산의 정기를 한번 마셨으니
인간 세상에서 벽곡의 신선이 되려 시험하는가.

過安樂見오 과안락견오
安樂城中欲暮天 關西孺子聳詩肩 안락성중욕모천 관서유자용시견
村風厭客遲炊飯 店俗慣人但索錢 촌풍염객지취반 점속관인단색전
虛腹曳雷頻有響 破窓透冷更無穿 허복예뢰빈유향 파창투냉갱무천
朝來一吸江山氣 試向人間벽穀仙 조래일흡강산기 시향인간벽곡선

*벽곡은 신선이 되기 위해 곡식을 먹지 않고 수련하는 방법.
*안락성에서 안락하지 않게 밤을 지냈음을 풍자했다.




김립(金笠) 김병연(金炳淵)이 쓴 조부 김익순(金益淳) 탄핵시(彈劾詩)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曰爾世臣金益淳 鄭公不過卿大夫 왈이세신김익순 정공불과경대부

將軍桃李隴西落 烈士功名圖末高 장군도리농서락 열사공명도말고

詩人到此亦慷慨 撫劍悲歌秋水溪 시인도차역강개 무검비가추수계

宣川自古大將邑 比諸嘉山先守義 선천자고대장읍 비저가산선수의

淸朝共作一王臣 死地寧爲二心子 청조공작일왕신 사지영위이심자

升平日月歲辛未 風雨西關何變有 승평일월세신미 풍우서관하변유

尊齊孰非魯仲連 輔漢人多諸葛亮 존제숙비노중련 보한인다제갈량

同朝舊臣鄭忠臣 抵掌風塵立節死 동조구신정충신 저장풍진입절사

嘉陵老吏揭名旌 生色秋天白日下 가릉노리게명정 생색추천백일하

魂歸南畝伴岳飛 骨埋西山傍伯夷 혼귀남무반악비 골매서산방백이

西來消息慨然多 問是誰家食錄臣 서래소식개연다 문시수가식록신

家聲壯洞甲族金 名字長安行列淳 가성장동갑족김 명자장안항렬순

家門如許聖恩重 百萬兵前義不下 가문여허성은중 백만병전의불하

淸川江水洗兵波 鐵甕山樹掛弓枝 청천강수세병파 철옹산수괘궁지

吾王庭下進退膝 背向西城凶賊脆 오왕정하진퇴슬 배향서성흉적취

魂飛莫向九泉去 地下猶存先大王 혼비막향구천거 지하유존선대왕

忘君是日又忘親 一死猶輕萬死宜 망군시일우망친 일사유경만사의

春秋筆法爾知否 此事流傳東國史 춘추필법이지부 차사유전동국사



☞ 기존 해석들을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수정(修正) 개역(改譯)해 보았습니다.


<해석>






말하노니, 그대 세록지신(世祿之臣 : 대대로 녹을 받은 신하) 김익순(金益淳)이여!

가산군수(嘉山郡守) 정시(鄭蓍) 공(公)은 경대부(卿大夫)에 불과했으나




농서(隴西)의 한(漢)나라 장군 이능(李陵)이 흉노에게 항복하듯 하진 않았으니 ,

충신열사의 공과 이름이 새겨진 도상[圖像 : 도말(圖末)] 가운데서도 정공(鄭公)이 으뜸이어라.




시인도 이에 이르러 비분강개하나니

칼을 어루만지며 이 가을 날 강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네.




선천(宣川)은 예로부터 대장(大將)이 지키던 고을이라

가산(嘉山) 고을에 비하면 먼저 충의(忠義)로써 지켰어야 할 땅이네.




모두 청명(淸明)한 조정(朝廷)에 한 임금의 신하로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어찌 두 마음을 품을 수 있단 말이냐.




태평세월이던 신미년(辛未年)에

관서(關西) 지방에 전운(戰雲)이 일어나니 이 무슨 변고(變故)인고?




제(齊)나라를 받드는 데 그 누가 노중련(魯仲連)과 같은 충신만 못하였겠으며,

한(漢)나라를 보필(輔弼)한 사람에는 제갈량(諸葛亮) 같은 충신이 많았네.


우리 조정에도 옛 신하 정충신(鄭忠臣)이 있어서

맨손으로 병란 막아 싸우다가 절개 지키고 죽었네.


늙은 관리로서 구국의 기치를 든 가산 군수 정공(鄭公)의 명성은

맑은 가을 하늘에 빛나는 태양과 같으리.


그대 넋(魂)은 남쪽 밭이랑으로 돌아가 남송(南宋)의 충신 악비(岳飛)와 벗하고

뼈는 서산에 묻혔어도 기개는 은(殷)나라 충신 백이(伯夷)의 옆자리라.


서쪽에선 매우 슬픈 소식이 들려오니,

묻노라. 그대는 누구의 녹(祿)을 먹던 신하인가.


그대 가문은 으뜸가는 장동(壯洞) 김씨요,

이름 자(字)는 장안(長安)에서 떨치는 [김조순(金祖淳)과 같은] 순(淳)자 항렬이네.


그대의 가문(家門)이 이처럼 성은(聖恩)을 두터이 입었으니

백만 대군 앞이라 할지라도 의(義)를 저버릴 수는 없었네.


청천강(淸川江) 물은 병마(兵馬)를 씻겨 물결치고

철옹산(鐵甕山)엔 나뭇가지마다 강궁(强弓)이 걸렸거늘,


우리 임금 어전(御前)에 진퇴할 때(드나들 때) 꿇던 그대 무릎을

서쪽 흉악한 역적(逆賊) 홍경래(洪景來) 앞에서 꿇었구나.


그대 넋은 죽어서 황천(黃泉 : 저승)길로 향하지 말라.

지하(地下)에는 열성조(列聖朝) 선대왕(先大王)들의 넋이 계시기 때문이거니.



이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육친을 저버렸으니

한 번 죽음은 오히려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


준엄(峻嚴)한 춘추필법(春秋筆法)을 그대는 아는가?

그대 행적(行蹟)은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전(傳)하여지리라.






어느 여인에게

나그네 잠자리가 너무 쓸쓸해 꿈자리도 좋지 못한데
하늘에선 차가운 달이 우리 이웃을 비추네.
푸른 대와 푸른 솔은 천고의 절개를 자랑하고
붉은 복사꽃 흰 오얏꽃은 한 해 봄을 즐기네.
왕소군의 고운 모습도 오랑케 땅에 묻히고
양귀비의 꽃 같은 얼굴도 마외파의 티끌이 되었네.
사람의 성품이 본래부터 무정치는 않으니
오늘 밤 그대 옷자락 풀기를 아까워하지 말게나.

贈某女 증모녀
客枕條蕭夢不仁 滿天霜月照吾隣 객침조소몽불인 만천상월조오린
綠竹靑松千古節 紅桃白李片時春 녹죽청송천고절 홍도백리편시춘
昭君玉骨湖地土 貴비花容馬嵬塵 소군옥골호지토 귀비화용마외진
人性本非無情物 莫惜今宵解汝거 인성본비무정물 막석금소해여거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元帝)의 궁녀. 흉노 땅에서 죽음.
*마외파는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때 양귀비가 피난 갔다가 죽은 곳.
*김삿갓이 전라도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커다란 기와집을 찾아갔다.
주인은 나오지 않고 계집종이 나와서 저녁상을 내다 주었다.
밥을 다 먹은 뒤에 안방 문을 열어보니 소복을 입은 미인이 있었는데 독수공방하는 어린 과부였다.
밤이 깊은 뒤에 김삿갓이 안방에 들어가자 과부가 놀라 단도를 겨누었다.
김삿갓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인데 목숨만 살려 달라고 하자 여인이 운을 부르며 시를 짓게 하였다.




김병연, 방랑시인 김삿갓




풍류정신 살려 난세 헤쳐나가자

풍류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오늘날처럼 자비와 사랑의 정신은 빛을 잃어버린 반면, 인심이 사납고 인정이 메마른 난세일수록 선현들의 여유롭던 멋과 슬기를 되새겨야 한다. 돌이켜보면 세태가 이처럼 각박해진 까닭은 물질만능과 황금제일주의의 서구식 풍조에 휩쓸려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를 하찮게 여긴 탓이다.

우리나라의 풍류는 민족 고유의 현묘한 도(道)요, 미풍과 양속의 자취이다. 품격이 우아하여 속된 잡사를 버리고 운치 있게 즐길 줄 아는 것이다. 세속의 헛된 명예나 사소한 이익을 멀리한 채 학문을 사랑하고 무예를 숭상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저자와 산수 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여유롭고 멋지게 한세상을 살아 넘기는 것이다.

조선왕조 말기를 살다 간 유명한 방랑시인 김삿갓은 우리에게 풍류와 해학정신이 왜 필요한가를 온몸으로 절실하게 말해주고 간 진정한 풍류가객이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김삿갓의 대표적 풍류시라고 할 수 있는 ‘대시(竹詩)’를 소개한다.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대로 / 바람치는대로 물결치는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이대로 /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붙이는 저대로
손님접대는 가세대로 / 시정매매는 세월대로
만사가 안되네 내 마음대로 / 그렇고 그렇고 그런 세상 지나가는대로 -
(此竹彼竹化去竹 / 風打之竹浪打竹 / 飯飯粥粥生此竹 /是是非非付彼竹
賓客接待家勢竹 / 市井賣買歲月竹 / 萬事不如吾心竹 / 然然然世過然竹)


숨어 살던 집 20여년전 찾아내


김삿갓이 평생을 해학과 풍자로 방랑하던 풍류시인이며 기인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있지만 그의 기구하고 불행했던 한삶의 자취를 똑똑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만큼 그의 일생은 널리 알려진 명성과는 달리 신비에 싸여 있어 강원도 영월 땅에 그의 일가가 숨어살던 집터가 있고, 김삿갓의 묘도 그 근처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도 불과 20여 년 전인 1982년 10월이었다. 김삿갓은 무슨 까닭에 방랑시인이 되어 고달픈 심신을 이끌고 이 땅의 산굽이며 물줄기를 이리저리 휘감아도는 풍류행에 나서게 되었을까.

평안도 용강 사람 홍경래(洪景來)가 썩은 세상 둘러엎고 새세상을 만들겠다며 무리를 모아 떨쳐일어난 것은 순조 11년(1811), 조선왕조 개국 이래 23왕 418년 동안 내내 멸시당하고 천대받아오던 서북 사람들의 원한과 울분이 마침내 홍경래라는 당년 32세 젊은 혁명가의 영도 아래 활화산처럼 무섭게 폭발한 것이었다. 당시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은 선천부사 겸 방어사였다. 홍경래군이 인근 고을을 휩쓸고 선천에 쳐들어왔을 때 겁쟁이 김익순은 반란군에게 항복하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더 살아보려다 영원히 욕된 이름을 남긴 셈이 되었다. 이듬해 봄, 난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모반죄로 처형당하고 그의 집안은 완전히 몰락했다. 이것이 미완의 정치적 혁명가 홍경래와 문학상의 혁명적 이단자 김삿갓 사이에 얽힌 비극적 운명의 사슬이었다.


할아버지 욕한 시 지을리 없어


불행중 다행으로 일가는 당대의 세도가문 안동 김씨 일족이라는 덕분에 부계?모계?처계 등 삼족을 멸하는 화는 면했지만 역적의 자손이라 고향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때 김삿갓은 겨우 다섯 살짜리 철부지였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순조 7년(1807) 3월15일에 김안근(金安根)과 함평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병하(炳河), 아우는 병호(炳湖). 출생지는 분명한 기록이 없지만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로 추정된다. 집안이 망하자 병하와 병연 형제는 김성수라는 종이 데리고 황해도 곡산으로 도망쳤고, 부모는 아우 병호를 데리고 경기도 광주로 도망쳐 숨어살았다.

2년 뒤 병하와 병연은 아버지가 보낸 사람을 따라 광주로 가서 가족이 다시 합쳐졌다. 아버지는 식솔을 이끌고 양평으로 들어갔는데, 병약하던 막내 병호가 죽어버렸다. 문중에서는 역적이 났으니 가문의 치욕이라면서 족보에서 지워 없앤다는 소리가 나왔다. 부모는 아들 3형제를 데리고 경기도 가평을 거쳐 강원도 두메산골로 들어갔다. 평창에서 조금 살다가 다시 영월 삼옥리로 이사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은 병연이 열일곱 살에 장가들고 맏아들 학균(?均)을 낳은 이듬해인 1825년. 홧병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김삿갓은 어찌하여 방랑길에 나섰을까. 최근까지는 김삿갓이 20세 되던 해인 순조 27년(1827년) 영월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할아비 김익순을 욕한 시를 지어 장원한 것이 가출·방랑의 계기라는 설이 정설처럼 굳어져왔었다. 병연이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자랑했지만 기뻐할 줄 알았더니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동안 숨겨왔던 집안의 내력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병연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역적의 자손인 데다 그 할아비를 욕하는 시로 상까지 탔으니 어찌 하늘을 쳐다보며 살 수 있으랴. 그래서 삿갓으로 하늘을 가린 채 정처없는 방랑길에 나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비상한 천재였던 김병연이 나이 스물이 되도록 치욕스러운 집안의 내력을 전혀 몰랐을 리가 없다. 할아비가 역적으로 처형당하고 집안이 망할 때 김병연의 나이 다섯 살이었으니 어렴풋이나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했을 것이고, 그 뒤 이리저리 떠돌며 숨어살던 일이며, 아버지가 울화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은 이유도 알고 남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병연이 자신의 할아비를 ‘만 번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매도했을 리도 만무하다.




금강산에 반해 봄·가을마다 찾아


여러 기록을 살펴보건대 그의 가출과 방랑은 빼어난 재주를 타고났건만 출신성분 때문에 구만리같은 앞길이 막혀버린 좌절감과 울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인생과 장래를 두고 수년간 고민하던 병연은 가출을 단행했다. 그것이 둘째아들 익균(翼均)이 태어난 직후인 22세 때라고 전한다. 대삿갓 쓰고 대지팡이 짚고 미투리 신고 방랑길에 나선 김삿갓은 이 고을 저 마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집도 처자도 버리고 길 떠난 김삿갓의 발길은 먼저 금강산으로 향했다. 김삿갓은 22세에 가출해 57세로 전라도 화순에서 죽을 때까지 35년을 방랑하면서 특히 금강산을 좋아해 여러 차례 찾았다고 한다. 그와 같은 시대 사람인 신석우의 ‘해장집’과 황오의 ‘녹차집’에 김삿갓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가 봄?가을마다 금강산을 찾을 만큼 금강산의 절경에 반했다고 한다. 다음은 김삿갓의 금강산 시 7, 8수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다.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 바위와 바위를 돌아가니 / 물에 물 산에 산 / 곳곳이 절경이로다! - (松松栢栢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

정해진 곳도 없으려니와 오라는 곳도 없이 떠난 유랑길, 구름 따라 물결 따라 발길 닿는대로 떠도는 신세, 행장이라고 별 것도 없었다. 스스로 읊은대로 ‘빈배처럼 가뿐한’ 삿갓 쓰고 죽장 짚고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진 것이 다였다. 삿갓을 노래한 그의 시 ‘영립(詠笠)’을 소개한다.

- 가뿐한 나의 삿갓 빈배와 같고 / 한번 쓰니 사십 평생 다 가는구나 / 소먹이 아이 들 에 나서며 쉽게 걸치고 / 고기잡이 노인 갈매기 벗삼는 것일세 / 술 취하면 바라보던 꽃 나무에 걸어놓고 / 흥 오르면 달뜬 누각에도 걸치고 오르네 / 세상사람 의관은 겉꾸밈이 한결같지만 / 하늘 가득 비바람쳐도 홀로 걱정 없어라.-


운률 아는 주인 만나면 환대받아


본명은 김병연, 자는 성심(性沈), 호는 난고(蘭皐)였지만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그는 누구에게도 이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삿갓쓰고 다니는 이 기이한 방랑시인을 가리켜 김삿갓, 한문으로는 김립(金笠)?김사립(金莎笠)이라고 불렀다. 김삿갓은 2년 뒤에 잠깐 돌아와 후사없이 죽은 형 병하에게 자신의 맏이 학균을 양자로 입양시키고 다시 방랑길에 나섰다.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떠도는 인생, 세상잡사 초탈하여 풍류 한마당으로 천지간을 배회하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김삿갓을 가리켜 뒷날 사람들이 ‘한국의 시선(詩仙)’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신선도 지상에 머무는 동안은 먹어야만 했으므로 때로는 마을에서 문전걸식도 했고 때로는 절에서 공양 신세를 지기도 했다. 어쩌다가 운률깨나 아는 주인을 만나면 제법 그럴듯한 환대도 받았을 것이고, 또 기막히게 운수대통한 날이면 풍류를 아는 어여쁜 기생으로부터 아래위로(?) 극진한 사랑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어느 날 어느 서당에 들러 잠시 쉬자니 버르장머리 없는 학동 녀석들이 초라한 행색의 김삿갓을 깔보고 놀려댔다. 김삿갓이 칠판 아닌 벽판에 시 한 수를 써붙인 뒤 이렇게 일러주고 떠났다. “이 시는 글자 뜻으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소리나는대로 새기느니라.”
- 書堂乃早至 / 先生來不謁 / 房中皆尊物 / 學生諸未十 -
또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유식한 척하는 부부가 밥때가 되어도 식사 대접할 마음이 없어 딴에는 암호같은 파자(破字)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마누라 ; 인량차팔(人良且八 ; 食具= 밥상 차릴까요?)
서방 ; 월월산산(月月山山 ; 朋出= 이 친구 가거든.)
파자시의 대가인 김삿갓 앞에서 이럴 수가!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었다. 김삿갓이 자기도 이렇게 파자로 암호같은 한마디를 툭 던지고 떠나버렸다. “이 견자화중(?者禾重)아 정구죽천(丁口竹天)이구나(猪種可笑= 이 돼지새끼들아, 가소롭구나!)”



이렇게 저렇게 모진 세파에 부대끼며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고 다녔으니 그의 입에서 아름답고 고상한 싯구만 나올 턱이 만무했다. 하지만 예나 이제나 세상의 인정이 죄다 메마른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따스한 마음씨로 정성껏 외로운 나그네를 대접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김삿갓은 어느 집에서는 이런 제목 없는 시 한 수를 선물로 남기고 떠나기도 했다.


가난이 죄

지상에 신선이 있으니 부자가 신선일세.
인간에겐 죄가 없으니 가난이 죄일세.
가난뱅이와 부자가 따로 있다고 말하지 말게나.
가난뱅이도 부자되고 부자도 가난해진다오.

難貧 난빈
地上有仙仙見富 人間無罪罪有貧 지상유선선견부 인간무죄죄유빈
莫道貧富別有種 貧者還富富還貧 막도빈부별유종 빈자환부부환빈







'회양을 지나며' 은근한 감칠 맛


- 네 다리 소나무 소반에 죽이 한 그릇 / 하늘과 구름이 함께 떠도네 /
주인장, 제발 무안해마오 / 물 속의 청산을 나는 사랑한다오. -
(四脚松盤粥一器 / 天光雲彩共徘徊 / 主人莫道無顔色 / 吾愛靑山倒水來)
풍류호걸 김삿갓 가는 길에 시와 술과 여자도 있었으리니 은근하고 감칠맛 나는 사랑의 시편도 어찌 없었으랴. 다음은 ‘회양을 지나며(淮陽過次)’라는 시.
- 산골 처녀 다 커서 어른같은데 / 분홍빛 짧은 치마 헐렁하게 입었네 /
맨살 허벅지 다 드러나니 길손이 부끄러워 / 솔울타리 깊은 집엔 꽃향기도 물씬하리.-
또 ‘기생에게 주다(贈妓)’라는 시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 꽃냄새 파고드는 사내 한밤중에 찾아가니 / 온갖 꽃 짙게 피어도 모두 무정터라 /
홍련을 꺾고 남포(南浦)로 가니 / 동정호 가을 물결에 작은배만 놀라네.-

이들 시에서 ‘솔울타리 깊은 집’이니 ‘남포’니 ‘동정호’니 하는 것은 모두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김삿갓이 함흥을 거쳐 단천에 갔을 때에 어떤 처녀와 눈이 맞아 3년간 훈장 노릇을 하며 살았다는 설도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삿갓은 자신이 처자식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부남이라는 점을 밝혔을까 아니면 숨겼을까. 오며가며 짧은 밤을 불태운 떠돌이 사랑이야 풍류가객 김삿갓으로서 한두 번이 아니겠지만 몇 해씩 한 자리에 주저앉아 신장개업(?)을 했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또 하룻밤을 지내고 보니 숫처녀가 아니어서 “털이 깊고 속이 활짝 열렸으니 필시 누가 지나갔으렸다?(毛深內? 必過他人)”하자 처녀가 이를 맞받아, “뒤뜰의 익은 밤은 벌이 없어도 갈라지고 개울가 버들은 비가 안 와도 잘 자란답니다(後園黃栗不蜂折 溪邊楊柳不雨長)”했다는 우스갯소리도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시문을 아는 기생들과 사귀며 시와 사랑을 주고받은 흔적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김삿갓의 시가 비록 고상한 양반들이 신주처럼 떠받드는 공맹(孔孟)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고전이라고도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시의 특성과 비상한 천재성은 그때까지 양반문학의 주류를 이루던 전통 양식의 한시를 다양한 소재와 어휘와 문자를 통해 풍자?해학?기지 넘치는 서민문학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 있다고 하겠다.


찾으러 온 아들 번번이 따돌려


그동안 양자로 간 학균 대신 집안의 대를 이은 익균이 아비를 찾으려고 여러 차례 집을 나서 풍문이 들려오는 곳마다 좇아다녔다. 간혹 바람결에 실려 묘향산에서 보았다는 소식도 있고, 또 평양기생과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있는가 하면, 영남땅 어디선가 객사했다는 불길한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학균이 한번은 경상도 안동에서, 한번은 강원도 평강에서, 또 한번은 전라도 여산에서 김삿갓을 찾아 집으로 모시고가려고 했으나 번번이 아들을 속이고 도망치는 바람에 놓치고, 결국은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시신을 모시고 돌아왔다. 철종 14년(1863) 3월29일 57세로 한 많고 파란 많은 이승살이의 막을 내린 김삿갓은 제2의 고향인 영월군 하동면 와석1리 노루목에서 외롭고 괴로웠던 유랑의 발길을 멈춘 채 영원한 휴식에 들어갔다.

현실이, 생활이 힘겹고 괴롭더라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말아야 한다.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힘겹고 괴롭다고 각박한 세태에 끼어들어 악을 써대야 하겠는가. 아무리 절망이 깊어도 희망은 잇는 법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끝으로 김삿갓의 시 한 구절을 더 소개하면서 이번 글을 마무리한다.

-세상 만사 이미 정해져 있거늘 / 뜬구름같이 덧없는 인생 공연히 서두르고만 있네.- (萬事皆有定 浮生空自忙).

황원갑<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







맷돌

누가 산 속의 바윗돌을 둥글게 만들었나.
하늘만 돌고 땅은 그대로 있네.
은은한 천둥소리가 손 가는 대로 나더니
사방으로 눈싸라기 날리다 잔잔히 떨어지네.





磨石 마석
誰能山骨作圓圓 天以順還地自安 수능산골작원원 천이순환지자안
隱隱雷聲隨手去 四方飛雪落殘殘 은은뇌성수수거 사방비설낙잔잔

*돌로 만든 무생물체도 그가 노래하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태어났다.

김삿갓 생가


시제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

一爾世臣金益淳 鄭公不過卿大夫 일이세신김익순 정공불과경대부
將軍桃李농西落 烈士功名圖末高 장군도리농서락 열사공명도말고
詩人到此亦慷慨 撫劍悲歌秋水溪 시인도차역강개 무검비가추수계
宣川自古大將邑 比諸嘉山先守義 선천자고대장읍 비저가산선수의
淸朝共作一王臣 死地寧爲二心子 청조공작일왕신 사지영위이심자
升平日月歲辛未 風雨西關何變有 승평일월세신미 풍우서관하변유
尊周孰非魯仲連 輔漢人多諸葛亮 존주숙비노중련 보한인다제갈량
同朝舊臣鄭忠臣 抵掌風塵立節死 동조구신정충신 저장풍진입절사
嘉陵老吏揚名旌 生色秋天白日下 가릉노리양명정 생색추천백일하
魂歸南畝伴岳飛 骨埋西山傍伯夷 혼귀남무반악비 골매서산방백이
西來消息慨然多 問是誰家食錄臣 서래소식개연다 문시수가식록신
家聲壯洞甲族金 名字長安行列淳 가성장동갑족김 명자장안항렬순
家門如許聖恩重 百萬兵前義不下 가문여허성은중 백만병전의불하
淸川江水洗兵波 鐵甕山樹掛弓枝 청천강수세병파 철옹산수괘궁지
吾王庭下進退膝 背向西城凶賊脆 오왕정하진퇴슬 배향서성흉적취
魂飛莫向九泉去 地下猶存先大王 혼비막향구천거 지하유존선대왕
忘君是日又忘親 一死猶輕萬死宜 망군시일우망친 일사유경만사의
春秋筆法爾知否 此事流傳東國史 춘추필법이지부 차사유전동국사

대대로 임금을 섬겨온 김익순은 듣거라.
정공(鄭公)은 경대부에 불과했으나
농서의 장군 이능처럼 항복하지 않아
충신 열사들 가운데 공과 이름이 서열 중에 으뜸이로다.
시인도 이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노니
칼을 어루만지며 이 가을 날 강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노라.
선천은 예로부터 대장이 맡아보던 고을이라
가산 땅에 비하면 먼저 충의로써 지킬 땅이로되
청명한 조정에 모두 한 임금의 신하로서
죽을 때는 어찌 두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태평세월이던 신미년에
관서 지방에 비바람 몰아치니 이 무슨 변고인가.
주(周)나라를 받드는 데는 노중련 같은 충신이 없었고
한(漢)나라를 보좌하는 데는 제갈량 같은 자 많았노라.
우리 조정에도 또한 정충신(鄭忠臣)이 있어서
맨손으로 병란 막아 절개 지키고 죽었도다.
늙은 관리로서 구국의 기치를 든 가산 군수의 명성은
맑은 가을 하늘에 빛나는 태양 같았노라.
혼은 남쪽 밭이랑으로 돌아가 악비와 벗하고
뼈는 서산에 묻혔어도 백이의 곁이라.
서쪽에서는 매우 슬픈 소식이 들려오니
묻노니 너는 누구의 녹을 먹는 신하이더냐?
가문은 으뜸가는 장동(壯洞) 김씨요
이름은 장안에서도 떨치는 순(淳)자 항렬이구나.
너희 가문이 이처럼 성은을 두터이 입었으니
백만 대군 앞이라도 의를 저버려선 안되리라.
청천강 맑은 물에 병마를 씻고
철옹산 나무로 만든 활을 메고서는
임금의 어전에 나아가 무릎 꿇듯이
서쪽의 흉악한 도적에게 무릎 꿇었구나.
너의 혼은 죽어서 저승에도 못 갈 것이니
지하에도 선왕들께서 계시기 때문이라.
이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육친을 버렸으니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너는 아느냐?
너의 일은 역사에 기록하여 천추만대에 전하리라.




내 삿갓


가뿐한 내 삿갓이 빈 배와 같아
한번 썼다가 사십 년 평생 쓰게 되었네.
목동은 가벼운 삿갓 차림으로 소 먹이러 나가고
어부는 갈매기 따라 삿갓으로 본색을 나타냈지.
취하면 벗어서 구경하던 꽃나무에 걸고
흥겨우면 들고서 다락에 올라 달 구경하네.
속인들의 의관은 모두 겉치장이지만
하늘 가득 비바람쳐도 나만은 걱정이 없네.


詠笠 영립
浮浮我笠等虛舟 一着平生四十秋 부부아립등허주 일착평생사십추
牧堅輕裝隨野犢 漁翁本色伴沙鷗 목수경장수야독 어옹본색반사구
醉來脫掛看花樹 興到携登翫月樓 취래탈괘간화수 흥도휴등완월루
俗子依冠皆外飾 滿天風雨獨無愁 속자의관개외식 만천풍우독무수

*자신의 조부를 탄핵하고 시작한 방랑 생활. 언제나 벗이 되어 주며 비바람에도 몸을 보호해 주는 삿갓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 ....그리해서 '병연'은 그 이름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 시인은 '병연'이란 이름을 스스로 숨기고 잊어 버렸다.
그리고 삿갓을 쓴 이름없는 시인이 되었다....그가 읊은 자신의 '삿갓'시는 표연자적하는 자연과 풍류 속의 자기 운명을 그린 자화상이었다


김삿갓,노자에 출생,성장배경,업적,본받을점
김삿갓
본관 안동. 본명 병연. 속칭 김삿갓. 자 성심. 호 난고. 경기 양주 출생.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로 있던 조부 익순이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폐족이 되었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형 병하와 함께 종이던 김성수의 구원으로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 거기서 공부를 하며 성장하였다.
뒤에 사면을 받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폐족자에 대한 천대가 심하고 벼슬길도 막혀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즐겨 큰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녔으므로 삿갓이라는 별명도 여기서 생겼는데, 전국을 방랑하면서 도처에서 즉흥시를 남겼다.
그의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고, 그런 작품에 뛰어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방랑을 계속하여 전라도 동복에서 객사하였다. 작품으로 《김립시집》이 있다.
김삿갓은 우리 문학사에서 남다른 시인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봉건적인 체제 속에서 남다른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 쳤으며, 그러한 몸부림을 한시의 형식 파괴로 보여 주었다.....
그의 시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더 큰 이유는 그가 한시의 형식을 파괴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형식이 파괴된 한시를 통해서 당시의 통속적인 가치 관념까지도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김삿갓의 사상
김삿갓의 방랑 생활은 출발 동기부터 불평객과 반항아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것은 그가 가명을 김란이라 하고 난고 외에 이명이라는 호로 불리고, 머리에 삿갓을 쓴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명(而鳴)은 중국 서적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있는 불평이명(不平而鳴)이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불평과 반항은 계급적 몰락에서 오는 개인적 입장에서 시작되었으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폭넓은 사회 경험을 함에 따라 세계관과 사회관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즉 조선 왕조에 대해 은근히 반대의 감정을 표시한 것은 물론 봉건 질서와 제도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빈부의 차가 심한 사회적 불합리를 저주하고 양반 귀족들의 죄악과 불의, 거만, 허식을 증오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중년을 넘으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그의 사상에 이러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폐족이라는 계급적 지위, 종의 집에서 자라난 유년 시기의 성장 과정, 또는 일생의 방랑 생활이 말해주는 불우한 사회적 처지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 그가 살던 조선 말기의 사회 환경과 시대 특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불행한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을 표시하고 만인이 갈망하는 벼슬을 포기함과 동시에 당시 봉건 질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그 사상과 태도 속에는 멸망과 붕괴에 직면한 민중들과 사회의 시대적 기운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상에서 가장 중심적인 경향은 강한 의분과 정의감에 기초한 반항 정신과 풍자 정신이었으며 인도주의로 받침되는 평민 사상이었다.
이 외에 자유분방함, 노골적인 연애 감정, 낙천성과 풍부한 유머, 개개 사물에 대한 실사구시적인 관심 등의 경향도 있으나 그것은 부차적인 의의를 가지거나 중심 사상의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그의 사상과 결부하여 몇 가지 특징을 말한다면 첫째, 이러한 사상 경향의 심도와 강도가 매우 철저하고 강렬했다.
일생 동안 방랑 생활을 하는 중 그의 아들이 세 번이나 찾아와서 귀가를 간청하였으나 끝까지 돌아가지 않은 점, 모친이 계신 외가가 있는 마을을 지날 때는 들러서 직접 만나지는 않고 산에 올라가 나무하러 온 아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갔다는 이야기, 친구 정현덕의 주선으로 왕의 사면을 받고 벼슬 받을 기회를 거절했다는 사실 등에서 그러한 특성을 볼 수 있다.
둘째, 사상 경향의 표현 방법과 형태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였다.
우선 방랑 생활 자체가 불평과 반항의 한 표현이었다. 그 이전의 많은 반항아들 역시 이 방법을 취했으니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일생을 방랑객으로 지냈고 봉건 체제에 반항했던 허균도 강원도, 경기도 등을 방랑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기이하고 광적인 행동도 반항적 태도의 한 표현이었다.
황오의 녹차집에는 '하루는 정현덕이 내게 편지를 보내 오기를 천하 기남자가 여기 있는데 한번 가 보지 않겠는가 하기에 같이 가 보니 과연 김삿갓이더라. 사람됨이 술을 좋아하고 광분하여 익살을 즐기며 시를 잘 짓고 취하면 가끔 통곡하면서도 평생 벼슬을 하지 않으니 과연 기인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석우는 해장집에서 '과거장에 들어가되 어떤 때는 수십 편을 짓고 나오고 어떤 때는 한편도 안 짓고 나오니 그 광태가 이와 같더라....과거장 밖의 술집에서도 그의 이름을 사랑하나 그 광태를 무서워하여 술을 모조리 먹어도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그의 기행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또 상대방을 공격할 때는 큰소리로 웃어주기도 하고 풍자와 재담으로 비꼬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취하였다.
이것은 일반 대중이 그와 그의 예술을 사랑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일부 양반들도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한편 즐겨 쓴 삿갓 역시 변형된 투쟁 무기였으니 보기 싫은 당시 사회와 세상에 대한 불평 불만의 사상적 표현이었다.
김삿갓은 조부를 탄핵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죄인이라기 보다는 봉건적인 지배 계급에 대한 반항아라는 사회 정치적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실천문학사 발행 <김삿갓 풍자시 전집> 참조.
((어린시절과 성장배경))
세도가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다섯 살 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선천 방어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반군에 투항함으로써 그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되어 멸족을 우려한 부친이 형과 함께 그를 곡산으로 보내 노비의 집에서 숨어 산다. 여덟 살에 조정의 사면으로 집으로 돌아오나 그 가족들이 온전히 터 잡고 살 곳이 있겠는가. 여주, 가평, 평창을 거쳐 영월에 정착을 해서 집안을 다시 일으켜보려는 모친의 후원에 힘입어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글공부에 힘 쓴다.
((학문과 업적및 사상에 대해서))
그의 사상에서 가장 중심적인 경향은 강한 의분과 정의감에 기초한 반항 정신과 풍자 정신이었으며 인도주의로 받침되는 평민 사상이었다. 이 외에 자유분방함, 노골적인 연애 감정, 낙천성과 풍부한 유머, 개개 사물에 대한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관심 등의 경향도 있으나 그것은 부차적인 의의를 가지거나 중심 사상의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본받을점))
어린시절.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글공부에 힘썼던점
1. 김삿갓
본이름은 김병연이며, 삿갓을 쓰고 방랑 생활을 했기 때문에 흔히 김싯갓이라고 불리움
2. 가정 배경
① 1807년 경기도 양주에서 김안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② 다섯 살 되던 해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 때, 선천 부사로 있던 할아버지(김익순)가 반란군과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여 역적의 집안이 되어 멸족의 화를 입기에 이름
③ 후에 정상이 참작되어 벌이 감해지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자식들이 멸시받는 것이 싫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 신분을 감추고 삶
④ 나이 어린 김삿갓은 자기 집안의 사정을 모르고 자람
3. 뛰어난 재능
①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살 전후에 이미 '사서삼경'에 통달하였고, 글재주 특히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남
② 방랑 생활을 하면서 사회 풍자와 해학이 담긴 시를 많이 지음
4. 방랑의 계기
① 20세 되던 해에 영월 고을에서 실시된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함
② 그 때의 시제가 "가산 군수 정시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 보아라." 였는데, 그는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백 번을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경멸하는 시를 쓰게 됨
③ 이후 어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역적의 자손이며,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죄책감 때문에 처자식을 둔 채 방랑의 생활을 하게 됨
5. 계속된 발랑 생활
① 방랑 생활 4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1년 정도 묵기도 했으나, 다시 집을 떠남
② 한 번은 충청도 계룡산 밑까지 찾아온 아들을 재워 놓고 도망하였고, 1년 만에 물어 물어 경상도 어느 산촌까지 찾아온 아들을 심부름을 보낸 후 도망을 함
③ 계속된 방랑 생활로 몸이 쇠약해져, 전라도 어느 선비 집에서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침
6. 방랑 생활에 대한 평가
1)긍정적인 평가 : 자신이 역적의 자손이며, 비록 모르고 한 일이지만 할아버지를 욕보인 죄인이라는 자책감 때문에 방랑 생활을 한 것은 그가 택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모르고 한 행동이라고 핑계를 대고 뻔뻔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삿갓은 양심의 가책으로 속죄를 위해 방랑 생활이라는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하였을지 모른다.
2)부정적인 평가 : 김삿갓이 방랑 생활을 선택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만, 다른 입장에서 더 나은 대안이 없었을까? 조상에게 지은 죄에 대해 속죄하는 방법으로 다른 것을 찾을 수는 없었을까? 역적의 자손으로 속죄를 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또 조상에 대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홀어머니를 더욱 극진히 모시고 자식들을 잘 기르고 가르쳐 떳떳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방법이 없었을까? 김삿갓이 근거로 삼았던 도덕 원리는 과연 참인가? 모두가 그 상황에서 김삿갓과 같이 행동하여도 되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면 김삿갓의 선택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나올 것이다.
※ 참고 자료


큰 삿갓을 쓰고 대나무 지팡이 짚고 한평생을 떠돌아다닌 방랑시인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이었다. 세도가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다섯 살 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할아버지의 잘못으로 집안이 온통 죽음을 당하게 되는 고난을 겪게 된다.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되어 멸족을 우려한 부친이 형과 함께 그를 곡산으로 보내 노비의 집에서 숨어살게 된 김삿갓은 여덟 살에 조정의 사면으로 집으로 돌아오나 그 가족들이 온전히 터잡고 살 곳이 없었다.
여주, 가평, 평창을 거쳐 영월에 정착을 해서 집안을 다시 일으켜보려는 모친의 후원에 힘입어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김삿갓은 글공부에 힘썼다. 나이 스물, 결혼한 그 해, 운명을 다시 바꾸게 한 시골에서의 백일장을 보게 되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공교롭게도 시험의 제목은
"가산군수 정시의 충성을 찬양하고 역적 김익순의 죄를 한탄하라" 였으니 자신의 할아버지를 욕보이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야만 했다.
"한 번은 고사하고 만 번 죽어 마땅하고 / 너의 치욕스러운 일동국의 역사에 유전하리."
그는 조부를 규탄하는 명문으로 장원에 급제하나 할아버지를 팔아 입신양명 하려고 한 자신에 부끄러움을 느껴 글공부를 포기하고 농사를 지으며 은둔 생활을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백일장을 보기 전에는 그의 조부가 김익순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러나 김삿갓은 신분 상승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지만 부패한 과거 제도에 실망을 하고 어느 세도가의 집에서 식객으로 지내던 중 그의 출신 성분이 주위에 알려지면서 제도권 진입을 포기하고 스물 다섯에 기나긴 방랑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김삿갓의 살림이라곤 얼굴을 거의 가리다시피 하는 큰 삿갓, 개나리 봇짐 하나, 그리고 대나무 지팡이가 전부였다.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특이한 복장을 한 김삿갓에게 물었다. "어찌 그렇게 큰 삿갓을 쓰고 다니오? 불편하지 않소?" "하늘 아래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몸이라 그러오. 허허허" 김삿갓은 할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것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그의 본명인 김병언으로 불려지지 않고 김삿갓이라고 된 것이다. 방랑 초기에는 지방 토호나 사대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나름대로의 품위를 유지하나 세상 인심이 한결 같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고 서민들 속에 섞여서 날카로운 풍자로 상류 사회를 희롱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으며 일생을 보낸다. 타고난 글 솜씨와 영리함으로 급제까지 했던 김삿갓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즉흥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산과 들 그리고 사람에 얽힌 그의 시는 한 수 한 수 철학이 깃들여져 있으며 풍자성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세도가와 거만한 부자들의 허풍을 마음껏 풍자하고 조롱하는 그의 시 속에는 당시 부당하게 대우받고 사는 가난한 백성들의 한풀이로서 충분했다. 때문에 김삿갓의 시는 가난한 백성들의 안식처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쉰 일곱, 전라도 땅에서 눈을 감음으로써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일생을 마감하고 아들 익균이 유해를 영월로 옮겨 장사를 지냈다. 영월 와석리에 그의 생가 터와 묘지가 있다.
*걸인 시인으로서의 김삿갓
김삿갓은 본래 권문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기구한 운명으로 일생을 문전걸식하며 돌아 다녔기 때문에 세상의 온갖 천대를 받고 인생의 어두운 면을 체험하게 되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걸인으로서의 체험은 그의 시를 더욱 깊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시는 세상의 야박함과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모순을 지적하고 있으며 때로는 이러한 냉대에 불평과 불만을 토하여 세태를 비웃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도 하였다.
그는 궁핍한 것도 원하지 않았고 부유한 것도 원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굶주림과 잠자리를 걱정해야 했다.

고향 생각

서쪽으로 이미 열세 고을을 지나왔건만
이곳에서는 떠나기 아쉬워 머뭇거리네.
아득한 고향을 한밤중에 생각하니
천지 산하가 천추의 나그네길일세.
지난 역사를 이야기하며 비분강개하지 마세.
영웅 호걸들도 다 백발이 되었네.
여관의 외로운 등불 아래서 또 한 해를 보내며
꿈 속에서나 고향 동산에 노닐어 보네.

思鄕 사향
西行己過十三州 此地猶然惜去留 서행기과십삼주 차지유연석거유
雨雪家鄕人五夜 山河逆旅世千秋 우운가향인오야 산하역려세천추
莫將悲慨談靑史 須向英豪問白頭 막장비개담청사 수향영호문백두
玉館孤燈應送歲 夢中能作故園遊 옥관고등응송세 몽중능작고원유


*오야(五夜)는 오경(五更)으로 오전 3시부터 5시 까지이다.







天皇崩乎人皇崩

萬樹靑山皆被服

明月若使陽來弔

家家詹前漏滴滴



天皇崩乎人皇崩(천황붕호인황붕)
천황씨가 죽었는가 인황씨가 죽었는가
萬樹靑山皆被服(만수청산개피복)
산과 나무 천하가 모두 상복을 입었구나
明月若使陽來弔(명월약사양래조)
해님이 소식을
듣고 내일 문상을 오면
家家詹前漏滴滴(가가첨전루적적)
집집마다 처마끝에 눈물을 흘리리라

= 해설 =

color=#000000>소리없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온 산과 나무, 천지가 하얀데 그 하얗고 아름다운 경치를
김삿갓은 마치
나라의 임금이 죽어 산천 초목이 상복을 입은 것으로 비유하였다.
또한 눈이내린 뒤 햇살이 비치면 눈이 녹아내려 고드름으로 변하여 처마 밑에
열리는
고드름을 아름답게 노래한 , 마음 푸근한
시이다



*자연 시인으로서의 김삿갓
김삿갓은 풍월이나 자연의 경관을 읊은 종래의 한시에서 벗어나 우리 생활과 밀접한 주변에서 시제를 찾아 예민한 관찰과 심오한 착상, 감정의 미묘한 표현에 뛰어났다.
간결하면서도 단순한 문자와 기발한 비유로 자연의 경관을 절실하게 표현하였다.
*인생 시인으로서의 김삿갓
이전의 사대부나 양반이라고 하면 대개 고상하고 단아한 선비의 기품을 숭상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위선과 허영으로 가득 찼다.
김삿갓은 권문세가 출신이었지만 다른 사람과는 달리 양반 계층의 허상과 추악함을 묵인하지 않았다.
시인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가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허식을 멀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그의 꾸밈없는 감정 및 현실의 노출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가 다룬 문제들은 기성의 가식, 도덕과 인습, 전통에까지 이르고 있고 당대의 선비로서는 엄두도 못 낼 소재를 택하여 인간의 감성을 사실대로 읊었다.
*풍자 시인으로서의 김삿갓
그의 시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풍자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풍자성으로 인하여 그의 시가 더욱 우리 가슴에 와 닿는지도 모른다.
그는 역경과 서러움으로 일생을 보내는 동안 때로는 현실을 비관도 하였지만 암울하기만 한 현실을 초탈하여 해학과 풍자로써 자신을 위로하였던 것이다.
때로는 직접적이고 신랄하게, 때로는 간접적이고 완곡한 풍자로 뛰어난 재치를 발휘하였다.
*역사 시인으로서의 김삿갓
그는 과시(科詩)라는 장편의 역사시를 남기고 있다.
대부분이 중국의 역사에서 취재를 한 것으로 그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는 시들이다.
이 역사시는 대개 18구로 되어 있는데 지식의 해박함으로 헌종, 철종 때의 선비들은 그의 작품을 존숭하였다고 한다.

 
출처 : krista4914
글쓴이 : krista4914 원글보기
메모 : 방랑시인 김삿갓 시와/할아버지 김익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