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련 여순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한 사람은 세로로 된 桶棺(통관ㆍ시체를 세워서 매장하는 방식)에 담기는 게 상례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 의사의 시신은 성당에서 마련한 가로로 된 소나무 寢梡(침관)에 담겨 매장됐다고 한다. 안 의사는 프랑스인 洪錫九(홍석구ㆍ프랑스명 빌레헴) 신부의 면회로 옥중 고해성사를 하고, 성제대례 및 성체성사를 거행했다. 그가 사망한 후 성당에서는 십자가를 마련해 침관 양편에 꽂았다. 안 의사는 모친이 마련해 준 한복 壽衣(수의)를 입고 영면했다. 안 의사의 시신은 차가운 봄비 내리는 저녁, 마차에 실려 감옥 묘지로 향했다.
광복 이후, 안 의사의 유언에 따라 남북한 당국은 유해발굴을 끊임없이 시도해 왔다. 우리 정부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시고자 다각도로 노력했다. 그러나 안 의사가 묻힌 지 98년, 광복 63년이 지났음에도 후손들은 부끄럽게도 안 의사 시신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다. 안 의사 유해가 매장된 지점에 관한 정확한 문헌기록이 없었고, 일부 口傳(구전)돼 내려오는 증언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99년 말, 안 의사 유해 매장지를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사진자료가 발굴되면서 안 의사 매장지 발굴작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崔書勉(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건넨 두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안 의사가 사형당할 때 뤼순감옥소 소장의 딸이었던 이마이 후사코(今井房子사망) 여사가 소장하고 있던 사진이었다. 이마이 후사코 여사는 생전, 최서면 원장에게 당시 5살이었던 자신이 안 의사가 사형 집행을 당하고 매장되는 것을 목격했다는 진술을 들려주며, 사진에 매장 위치를 표시해 주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과 奉還(봉환)을 위한 남북공동조사단 파견계획은 2004년 당시 鄭東泳(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남북 공동 발굴 추진계획’으로 언론에 보도된 후 구체화됐다. 이후 15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이 문제가 논의됐고, 수차례 남북한 실무접촉이 이어졌다. 비협조적이었던 중국 당국도 협조적으로 태도를 바꾸자 2006년 6월 남북한은 남북 공동조사단을 중국 현지에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여순(뤼순)감옥소 뒤편 원보산이 유력한 매장 추정지
1945년 이후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 유해가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모두 4곳으로 추정됐다. 여순감옥 뒷산은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사진을 통해 지적한 지역으로 유해 매장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여순감옥 공동묘지’의 열사 묘역은 안 의사와 거사를 같이한 劉東夏(유동하) 선생의 외조카인 시인 김파 씨가 진술한 지역이다. 여순 203고지에서 성포로 가는 삼거리에 있는 ‘여순감옥 공동묘지’ 의견과, 여순감옥 정문에서 서쪽으로 약 800m 지점 8부 능선상이라는 신현만 씨의 주장도 있었다.
2006년 6월 남한 측 15명, 북한 측 8명으로 구성된 남북 공동조사단은 6월 7일부터 11일까지 대련 여순감옥 관계자의 안내로 4개 지역을 모두 현장 확인했다. 조사단은 매일 두 차례 이상 남북 공동회의를 거쳐 조사장소를 결정했고, 중국 측의 협조를 받아 육안 확인ㆍ사진촬영ㆍ지표조사, 관계자들의 증언을 청취한 후 토의를 했다.
2005년까지 제시된 사진자료와 뤼순 일대 지도, 감옥 부근 평면도, 사형집행보고서, 증언 등을 바탕으로 했다. 남북공동조사단은 1~4의 추정지역을 직접 조사한 결과와 사형집행보고서, 이마이 후사코 여사의 증언, 그녀가 제공한 두 장의 사진, 중국 측 관련 출판물 등을 종합해, 안 의사 유해 매장지는 4개 장소 중 감옥소 뒤편 원보산 하단이 유력하다고 결론짓고 이 지역 일대 2만 5000㎡(7562평)에 대한 보존, 그리고 발굴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 대한 試堀(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데 남북이 의견을 같이 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남북 공동 조사 결과에 따라 유력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매장지로 최서면 원장이 제보했던 랴오닝성(遼寧省) 대련시(大連市) 여순구(旅順區) 內(내) 日我監獄舊地(일아감옥구지) 뒷산(원보산)을 지목했다.
국가보훈처가 안 의사 유해발굴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지만, 국내외 사정으로 수차례 발굴계획이 연기됐다. 남북한 당국은 중국 당국에 유해매장 추정지에 대한 현장 보존을 요청했다.
그러나 2007년 10월 예기치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중국 대련 여순 현지에서 진행된 아파트 터파기 공사로 인해 안 의사 유해 추정 매장지 일부가 훼손됐다는 언론보도가 나온 것이다. 이로 인해 긴급 발굴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안중근 의사 순국 당시의 여순감옥(左)과 현재 모습(右). |
2008년 3월, 우리 정부는 북한 측의 동의를 얻어 북측을 제외한 韓ㆍ中(한ㆍ중) 발굴단을 구성하고, 2006년에 중국 정부에 보존을 요청한 지역 중 남아 있는 일부 지역에 대한 긴급 발굴을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 실시하기로 했다. 발굴조사는 2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안 의사 매장 추정묘역은 훼손되지 않아 1차 발굴은 중국 측의 협조로 올 3월 25일부터 4월 2일까지 9일간 진행됐고, 2차 발굴은 지난 4월 10일부터 27일까지 18일간 이뤄졌다. 1차 발굴은 2006년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本(본) 발굴조사를 진행하기 위한 예비조사의 성격이었다. 중국 측과의 행정적 협의, 현장사무실 설치, 발굴조사 장비 및 인부 모집, 발굴대상지역 현황파악, 조사범위 설정, 탐색 구덩이 설정 및 조사, 기록관리를 위한 촬영 등에 중점을 두었다.
유해발굴조사단은 李炳龜(이병구) 국가보훈처 보훈심양국장(단장)을 위시해 朴善周(박선주) 충북대 박물관장을 발굴조사팀장으로 하고, 지질탐사팀(한국지질자원연구원), 행정지원팀(국가보훈처, 외교통상부 등)으로 구성했다. 발굴조사팀은 3월 25일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을 위해 중국 대련(大連)을 향해 출발했다. 대련공항에 도착하니 대련市(시) 안중근 의사 연구회 박용근 회장이 마중을 나왔다. 발굴조사팀은 곧장 대련시정부로 향했다. 대련시 부시장 등 관계자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발굴 일정을 협의했다.
3월 26일 아침 10시 발굴단은 여순감옥소에 자리한 안 의사 동상 앞에서 안 의사 순국 98주년 추모행사를 가졌다. 총영사를 비롯한 관계자들과 발굴조사팀이 모인 가운데 조촐하게 펼쳐진 행사였지만, 안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고 돌아가신 그 장소에서 추모제를 치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오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무 늦게 와 죄송합니다’라는 말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죽은 뒤에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國權(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返葬(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독립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 최후의 유언이 이병구 단장에 의해 낭독되는 순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추모식을 마치고 발굴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은 여순감옥 뒷산에 있는 아파트 공사부지로, 이미 盛土(성토)가 돼 있었다. 순간 심한 黃砂(황사) 바람이 불었다. 일행 중 하나가 “안 의사가 우리가 온 것을 반기는 모양”이라고 했다. 현장을 확인한 후 여순감옥으로 돌아왔다.
감옥 뒷산 묘역에서 찍은 여순감옥소 사진으로 1906년경에 촬영된 것이다. 1911년 당시 여순감옥 소장의 딸인 이마이 후사코 여사가 소장했던 사진으로, 감옥에서 사망자를 위한 법회 후 찍은 사진이다. 화살표는 안 의사의 묘를 가리킨다. |
여순감옥소에서 발굴조사단 회의
발굴팀장인 박선주 교수는 “우리가 발굴한 장소는 아파트부지 공사터와 군 부대 담장 근처”라며 “기후 변화가 심한 곳이니만큼 정해진 날짜에 발굴을 마치려면 컨테이너로 현장사무실을 설치해야 한다”고 했다.
박 교수는 “중국 정부에서 중지 명령이라도 떨어지면 언제라도 철수해야 한다”면서 “여순 지역은 외국인 출입금지 구역으로 쉽게 들어 올 수가 없는 곳이나 가능성 있는 지역은 모조리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2006년 중국 정부가 남북한의 발굴 요청에 대해 협조를 해주지 않다가 이번에 마지못해 발굴 조사를 허가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당초 2006년 남북한과 중국이 공동 발굴을 하기로 합의했으나, 발굴이 연기되는 과정에서 돌연 중국이 민간업자에게 유해 발굴 예정지에 아파트 건설 허가를 내준 것이다. 아파트 부지 작업으로 안 의사 매장 추정지는 이미 掘鑿機(굴착기)가 할퀴고 지나간 후였다. 다행스럽게도 매장 추정묘역을 사진을 토대로 정밀 분석한 결과, 훼손된 부분은 안 의사의 유해가 묻힌 장소가 아니었다.
여순감옥에서 진행 중인 발굴조사단 회의. |
여순구청에서 열린 회의에서 중국 측은 “중국 인민들은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며 한국 측의 유해 발굴 의사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발굴을 마쳐달라”고 했다. 그들은 “지역 주민들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개인 시공업자가 공사를 시작한 것이므로 발굴을 시작하면 공사중단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왕 사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개발업자는 “정부 지시에 따라 아파트 공사를 잠시 중단하지만, 그로 인한 피해가 워낙 크니 경제적 손실을 보상해 달라”고 했다.
우리 측은 “우리는 발굴작업만 할 뿐, 피해보상 문제는 국가 간에 논의해야 할 사안”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대련시에서 파견 나온 행정담당 주임은 “公安(공안)이 항상 같이 행동할 것이며 현장을 떠나게 될 때에는 항상 담당자에게 알리라”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모든 일을 알리라니. ‘아참, 여기는 사회주의 국가지’하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발굴팀은 매일 아침 8시 15분 승합차로 숙소로부터 3~4km 떨어진 발굴현장 여순 감옥소로 향했다. 흐린 하늘에 잿빛의 낮은 건물이 들어선 음울한 거리, 일터로 향하는 표정 없는 사람들의 모습은 중국 TV에서 본 화려하고 활기찬 모습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다.
발굴단은 지난 3월 26일 여순감옥소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안 의사 순국 98주년 추도식을 가졌다. |
중국 측과 異見
安 의사 유해발굴현장에 현장사무소를 설치했다. |
대련 여순에 도착한 다음날인 3월 27일, 현장사무소로 사용될 컨테이너가 들어왔다. 내국인 거래 가격보다 두 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처음에는 천막을 치려 했으나 한 달이 넘는 발굴이라 기후와 안전을 고려해 컨테이너를 설치하기로 했다. 모든 장비와 인력은 ‘주태후’라는 별명을 가진 여순구청 외사담당 주임을 통해 구했다.
발굴조사팀은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은 현장설치를 하고, 다른 팀은 현장구역정리와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예정지역을 세 구역으로 나눠 7~8개의 트렌치(지표면을 도랑처럼 파는 것)를 넣기로 했다. 한창 작업을 하고 있는데 ‘주태후’ 주임이 달려왔다. 그는 “왜 땅을 파냐, 우리에게 발굴허가를 받았냐”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발굴조사를 시작할 때 실시하는 통상적인 과정인데 이것을 허가 받으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박선주 교수가 “처음 발굴을 시작하기 전에 地表(지표)조사를 하고, 그 다음 단계로 試掘(시굴), 發掘(발굴)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는 시굴 중이다. 조사를 못하게 하면 어떻게 발굴을 할 수가 있는가” 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사실, 이번 발굴조사에 대해 한국과 중국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었다.
한국 측이 발굴 일정을 다음달인 4월 19일이라고 통보했기에 중국 측은 4월 19일 이전에는 어떤 형태든 상부의 허가 없이는 땅을 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표조사는 2006년에 이미 진행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시굴과 발굴을 해야 한다고 맞섰다.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시굴은 상부의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중단됐다.
그날 저녁, 여순감옥소 소회의실로 돌아와 중국 측과 회의를 가졌다. 팀장인 박선주 교수는 “한국 측 외교관들 앞에서는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해놓고 지금 와서 말을 바꾸니 앞으로 작업할 때마다 발목을 잡는다면 아예 발굴을 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박선주 발굴팀장이 한국 측 발굴계획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이해를 시키자 여순감옥소의 왕진인 학예관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겠다는 박선주 교수의 각오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다”며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나왔다.
3월 28일, ‘주태후’ 주임이 “땅을 파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왔다”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현장사무실을 설치하고 발굴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박선주 교수를 비롯한 발굴팀은 8년간 한국에서 6ㆍ25 전사자 발굴과 민간인 집단 희생자 발굴을 하면서 나름대로 축적한 노하우가 있어 유해 발굴이 낯설지 않았다.
중국 관계자들도 발굴에 필요한 일들을 바로바로 행동에 옮기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발굴현장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면서 현장 일은 쉽게 풀려나가는 듯했다.
우리는 인부들과의 통역이 필요하다고 중국 측에 요청했다. 인부와 통역의 인건비는 우리가 지출하는 것이지만 우리 입맛에 맞는 인부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인부를 부탁하고 현장에서 필요한 장비들을 구하러 시내로 나갔다. 필요한 장비들을 사는 데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고, 상점마다 바가지를 씌웠다.
유해발굴 조사지역을 표시한 구글사진. A, B지구를 한국측이, C지구를 중국측이 나눠서 발굴했다(조선일보 DB사진). |
2개 시굴 지점에서 遺構 흔적
C구역에서 출토된 건물의 목재편. 안 의사 유해가 나올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했다. |
3월 29일, 토요일이었다. 그러나 발굴팀은 휴일 없이 일을 해야 했다. 중국과 한국 사이의 외교문제가 걸려 있어 언제라도 발굴 중지 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굴현장이 군사지역이라선지 토요일에도 公安(공안)이 따라붙었고, 정해진 숙소와 여순감옥소, 발굴현장 외에 여순 시내는 출입이 불가능했다. 휴일에도 시간을 발굴 현장에서 보내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했다.
중국 측은 우리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발굴시스템을 보고는 몹시 놀랐다. 마침내 여순감옥소 왕진인 학예관이 “한국 발굴팀에 합류해 발굴과정을 배우며 돕고 싶다”며 발굴팀에 합류했다. 우리도 서로 도움이 될 것 같아 흔쾌히 승낙을 했다.
2개의 시굴 지점에서 遺構(유구ㆍ옛 건축물의 흔적)가 보였다. 조짐이 좋아 보였다. 3월 30일 굴착기가 현장에 투입됐다. 굴착기 하루 사용료가 인민폐로 3000원, 운반비는 800원으로 ‘살인적’이었다. 3월 31일, 발굴현장을 A, B, C 세 지점으로 나눠 표토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2차 本(본)발굴의 준비가 완료됐다. 불과 9일간의 조사였지만 짧은 시간에 2차 발굴 준비를 마치고 일단 귀국길에 올랐다.
2차 발굴조사는 2008년 4월 10일부터 27일까지 18일간 진행됐다. 4월 10일, 발굴조사팀은 중국으로 출국해 2차 발굴을 재개했다. 현지에 도착한 조사단은 1차 발굴조사에서 작성한 현장 도면을 바탕으로 발굴현장을 확인하고 현장 사무실을 다시 정비했다. 1차 발굴조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 발굴지역과 현장사무소 주위를 테이프로 둘러치고 갔었는데 돌아와 보니 훼손된 곳이 없었다. 1차 조사를 마치고 떠나면서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현장사무소와 장비를 모두 남겨놓고 떠날 때는 솔직히 불안했었다.
2차 발굴조사팀에는 1차 조사팀에 참여하지 못한 대원들이 참여하는 관계로, 2차 발굴일정 초기에 발굴 현장현황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2차 발굴조사는 1차 발굴에 이어 본격적으로 발굴이 착수되는 시기로, 조사단 구성에 대한 협의가 이뤄졌다. 한국과 중국 측이 각각의 단장을 두고 별개로 발굴하는 방안, 한국 측에서 단장을 맡고 각각의 지도위원을 두고 공동으로 발굴하는 방안이 거론됐다.
중국 측의 동의를 얻어 발굴조사의 효율성과 전문성, 그리고 해외발굴 조사의 특수성을 고려해 두 번째 안을 채택했다. 박선주 교수가 공동발굴단장을 맡고, 양 측에서 각각 1명씩 조사위원을 두기로 했다. A, B, C로 나눈 구역 중, A와 B 구역은 한국 측이 C 구역은 중국 측 조사위원이 책임지고 발굴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1차 발굴 때 중국 측과의 의견차로 발굴팀들은 힘들 때도 많았다.
발굴단장은 매일 아침 회의에서 “어떤 유물이 나오더라도 꼭 중국 측에게 통보해야 한다”면서 “그것이 유해를 찾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생각을 갖고 사진과 비디오로 기록을 남기라”고 했다.
우리는 현장에서 조그만 유물이 나오더라도 중국 측에게 바로 알리고 논의했다. 우리의 태도가 중국 측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 그들의 태도도 조금씩 우호적으로 돌아섰다.
4월 11일, 우리의 일상적인 하루는 1차 때와 똑같이 이뤄졌다. 15인승 미니버스를 타고 8시 20분까지 여순감옥소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아침회의를 15분 정도 하고 발굴장으로 옮겨 일을 시작했다. 오전 작업을 마치면 감옥소 직원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작업이 끝나면 다시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반복적인 일과였다. 하지만 서울서 가끔씩 손님들이 찾아오면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대련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4월 12일, 토요일이지만 발굴작업은 계속 됐다. 오전 회의에서 안중근 의사 유적지와 관련, 地籍圖(지적도)에 나타난 감옥소 客舍(객사) 번호를 찾는 작업을 했다. 왕진인 학예관이 자료로 감옥소 소장의 책을 제공했으나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의 자료를 보여주면 왕 학예관은 놀라며 “어떻게 이런 귀한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었냐”며 감탄하곤 했다.
C 구역은 충북대 박물관 소속의 우종윤 조사위원과 ‘일아감옥구지박물관’의 왕진인 학예관이 참관한 가운데, 우종윤 조사위원의 지시에 의해 굴착기 투입이 이뤄졌다. 트렌치 규모는 너비 8m, 깊이 약 1.5m, 길이 약 30cm였다. 필요한 인부 20명을 현장에 투입했다. 인부를 포함해 현장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순구청에서 파견 나온 외사처 직원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오후에는 굴착기가 고장을 일으켜 C 구역에 대한 작업을 중단하고 인부들을 B 구역 평탄화 작업에 투입했다.
식기와 약품뚜껑 모습 드러내
C구역에서 출토된 유물들. 감옥서 초기에 사용된 벽돌(上), 도자기편(中), 밥그릇(下). |
4월 13일, 굴착기가 B 구역 평탄화 작업에 투입됐다. C 구역은 전일부터 계속 발굴 지역을 넓혀, 철탑 쪽으로 진행되던 트렌치를 좌우로 확장했다. B 구역에서 평탄화 작업을 하던 중, 水口址(수구지ㆍ물을 흘리거나 끌어들인 흔적)가 나타났고, 오후 2시경 완전히 노출됐다. 建物址(건물지)는 적벽돌로 11단 정도를 쌓은 후, 바닥면과 내부를 시멘트로 처리했다. 내부는 비닐봉지, 조개껍데기, 옷, 신발밑창, 고무호스 등의 생활쓰레기로 심하게 악취가 났다. 같은 형태의 구조물이 감옥소 안에도 있는데, ‘야채 절임 탱크’라는 안내문이 있었다.
4월 14일, B 구역에 대한 평탄화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철사와 철못, 자기편류 등이 출토됐다. 오전 11시경 옛 건물의 흔적인 유구를 확인했고, 바닥면을 정리함으로써 트렌치에 대한 작업을 완료했다. 아울러 C 구역에 대한 바닥면 정리와 벽면 정리 작업을 실시했다.
4월 15일, C 구역의 남동사면에 대한 土層(토층)사진을 찍었으며, 이 과정에서 바닥면에서 舊(구)지표의 일부분이 노출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C 구역 북서 경사 비탈면에서 감옥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식기(밥그릇)와 약품뚜껑 등이 발견됐다. 발굴단은 흥분했다. 군부대 철문 기준점에서 74m 지점 되는 곳에서 탄피, 엽전, 나사못 등도 출토됐다. 형무소 앞 편의점에서 남자 발굴대원들이 2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무려 10원씩 주고 사먹고 있었다. 받아놓은 영수증으로 다음날 중국 여자들과 목청을 높여 돈을 돌려 받았다. 돌려 받은 돈은 그날 저녁 식사 때 식사를 도와주는 어린 여자아이 손에 쥐여 줬다. 그 아이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우리의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4월 16일, 오전 회의 중 지질탐사팀의 장비반입 승인통보와 사진측량 전문가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진기록을 남기기 위해 B 구역에 대한 청소를 실시했다. 청소를 완료한 후 5번 유구까지 사진촬영을 끝마쳤다. C 구역에서는 러시아제로 추정되는 벽돌과, 군부대 철문 기준 70m지점에서 밥그릇 등이 출토됐다.
오후가 되면서 사진촬영을 하지 못한 유구에 대한 촬영과 실측작업이 이뤄졌다. 출토되고 있는 자기류 등의 유물에 대한 세척도 했다. 오후 작업이 마무리 되면서 C 구역에서 기존에 존재하던 계곡부의 일부가 노출되는 것을 확인했다.
4월 17일, C 구역 북서 경사 비탈면으로 쓰레기 폐기장으로 보이는 유구에 대한 노출 작업이 있었다. 인근 부분에서 바닥면 확인 작업 중 목재가 출토됐다. 안 의사의 유해가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우리의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했다.
계곡부의 層位(층위)를 파악하기 위해 일부의 둑을 남기면서 작업을 진행했다. 오후로 들어서면서 군부대 철문을 기준으로 오른편 111m 지점에 위치하는 A 구역에 대해 기존 트렌치에 대한 생토층 확인을 위해 확장작업과 제토작업을 실시했다. 기준점의 오른편 58m 지점 인근으로 축사 분뇨 구덩이를 제토작업을 통해 확인했다. 4월 18일, C 구역에 대한 바닥면 정리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북서 경사면에서 쓰레기 폐기장으로 보이는 유구에 대한 노출 작업을 전일에 이어 진행했다.
4월 19일, 사진측량 전문가가 50mm 표준렌즈를 장착한 ‘4×5판 구형카메라’와 ‘평면 카메라’로 발굴현장 주변을 촬영해 분석했다. 사진측량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감옥소 전경사진은 C 지역 군부대 담장 끝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또한 안 의사 묘를 가리키는 사진은 군부대 내 창고 건물 옆 나무와 전봇대 사이에서 촬영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안 의사 묘역은 군부대의 철문에서 동쪽으로 80m 떨어진 담장지점에서 북으로 30~40m 사이에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사진에 대한 정밀 판독결과, 사진은 군부대 담장에서 동쪽으로 10여m 떨어진 평지에서 촬영한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굴착기로 쓰레기더미를 치우는 발굴단원들. |
10t 트럭으로 300여 대분의 흙 파내
현장설명회에서 발굴단에게 자문하는 최서면 원장. 최 원장은 유해발굴에 결정적 제보를 했다. |
감옥소 전경사진을 촬영한 지점은 붉은색을 띤 토양으로 과거 벽돌 원료로 사용하기 위해 많은 흙이 파여 나가고 폐기물로 채워진 지역이다. 4월 20일, A 구역부터 C 구역까지 구역별 영역의 넓이를 산출했다. C 구역 내 쓰레기 소각장으로 추정되는 유구의 크기를 측정했다. 계곡부의 위치를 확인했고, 옛 건물 흔적에 대한 번호를 부여한 후 사진촬영을 실시했다.
4월 21일, 아침부터 봄비가 추적거리며 내렸다. 발굴 현장에서 비는 반가운 손님이자 훼방꾼이다.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 그러나 발굴조사팀은 복닥거리는 현장 사무실에서 사진합성작업을 하며 도자기 세척, 명문확인 작업과 함께 유물에 대한 接寫(접사) 등의 사진 촬영을 했다. 아울러 ‘여순일아감옥구지’에 대한 연보자료를 구해 건물 증축에 관한 내용을 발췌했다. 오후, 지질탐사팀 5명이 투입됐다.
4월 22일, 오늘도 비가 온다. 날씨도 구질구질하고 쌀쌀하다. 현장 사무소에서 출토된 유물을 세척하고 복원작업을 통해 몇 개의 유물을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하품을 해대며 ‘낮잠보다는 보람된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현장 설명회를 위한 사진합성 작업과 문서 정리작업도 해두었다.
4월 23일, 날씨가 흐리고 쌀쌀한 바람이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 속옷으로 중무장했기에 망정이지 정말로 고약한 날씨였다. C 구역을 철탑 방향으로 확장을 시도해 生土(생토)를 노출시키려고 했다. 작업이 진행되는 도중 정리되지 않은 비탈면과 바닥면과 벽면에 대한 정리작업을 실시했다. 실측과 발굴조사가 완료된 A 구역에 대해 복토작업을 실시했다. 지질탐사팀은 B 구역에 대한 구획을 설정한 후 GPR(Ground Penetrating Radar) 테스트를 실시했다.
4월 24일, C 구역 내 벽면에서 확인되는 생토층을 포함하는 토양층을 조사했다. 발굴된 C 구역의 전체 면적을 산출했다. 10t 트럭으로 300여 대분의 흙을 파냈다. 정말 사람의 힘으로는 엄두도 못 낼 양을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해내다니, 모두들 ‘기계 예찬’을 해댔다. 안 의사 유해 묘역으로 추정되는 지점의 토양의 물리화학적 조사를 위해 토양시료를 3봉지(700g) 채취했다. 실내작업으로는 <여순일아감옥구지>에 대한 연보자료를 토대로 1905년에서 1945년까지 감옥소에서 진행된 사건 중 감옥소 증축에 관련된 내용을 정리했다.
4월 25일, 발굴작업이 끝날 때를 아는지 해가 활짝 비친다. C 구역 내 바닥면을 정리하면서 GPR테스트를 함께 실시했다. 전일부터 작업이 시작된 A 구역에 대한 복토작업을 진행시켰다.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과 화문귀 여순감옥소 박물관장, 이병구 국가보훈처 보훈국장 등 관계자들이 자리한 가운데 발굴단장의 현장설명을 들었다. 특히 안중근 유해 발굴사업을 보이지 않게 후원해 온 최 원장은 감개가 무량한 듯 눈을 감고 내용을 음미했다. 80 노구를 이끌고 멀리 대련 여순까지 와서 지난 40년간의 당신 노력을 검증하는 현장을 두루 보시고 그 결과를 들으니 얼마나 감회가 새로울까. 발굴단은 지금까지의 증거로 볼 때, 안중근 의사의 墓域(묘역)은 확인할 수 있으나, 안 의사의 墓(묘)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감옥소 기록에 나타난 1916년, 1921년, 1923년에 진행된 감옥소 증개축 과정에서 안 의사의 묘가 훼손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귀국 전 여순감옥소 앞에서 기념촬영. |
안 의사 墓域 확인이 최대 성과
실제 1945년 일본이 항복하면서 사흘 동안 감옥소의 문서들이 파기됐다는 문헌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시기에 어떤 일이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철저한 문헌기록 조사가 필요하다고 발굴단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앞으로 새로운 명확한 증거가 없는 한 안 의사 유해발굴조사는 이번으로 끝이라는 생각이다.
4월 26일, B 구역에 대한 복토 작업을 실시하고, 사진 합성작업과 문서 작업을 병행했다. 발굴도면에 대해 최종적으로 수정을 가했고, 지질탐사팀은 발굴지의 북동편에 위치한 원보산에서 GPR 테스트를 실시했다. 2차 발굴팀은 철수를 준비했다. <여순일아감옥구지>에서 빌린 사무실의 집기들을 손보고 장비 등을 갈무리했다.
4월 27일, 覆土(복토)작업이 끝나지 않은 C 구역 내의 복토작업을 다음날 출발하는 지질탐사팀에게 부탁하고 발굴장비는 컨테이너에 갈무리해 ‘일아감옥구지박물관’에 부탁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중국 측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별이 아쉬운 표정들이다. 특히 공안국 소속인 진 선생은 낯이 익은 손자를 오늘도 데려왔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기념촬영을 하자는 의견에 발굴단 모두가 찬성이다. 태극기가 이렇게 소중하고 멋질 줄이야.
안타깝게도 발굴조사단은 죽어서라도 고국의 땅을 밟고자 한 안 의사의 百年寃(백년원)과 민족의 한 가닥 恨(한)을 풀지 못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지금도 차디찬 囚人(수인) 묘지에 묻혀 있는 안중근 의사의 恨(한)을 풀어줄 백마 탄 超人(초인)을 고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