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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울밑에선 봉숭아(김천애)

윤정의 일상 2008. 7. 25. 08:43
 


울 밑에 선 봉숭아


 

                                            김       성       삼

                                            음악협회 공주 지부장

                                            공주고등학교 교사


   1.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 봉숭아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가곡을 봉숭아라고 한다. 그가 떠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났는데도 그의 음악은 우리를 감싸주고 있다.

  일본이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와 남쿠릴열도 어로분쟁 등으로 새삼스럽게 일제 36년간의 쓰라렸던 일들이 되살아나 우리를 슬프게 한다.  과거 일본인들은 우리말을 못쓰게 하고 우리의 노래마저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당시 우리민족의 억압당하던 슬프디 슬픈 심정을 노래했던 ‘봉숭아’를 부르지 못하게 했던 것은 그 노래가 그만큼 망국 설음의 정서를 잘 반영한 때문이라 하겠다.

  이 ‘봉숭아’를 작곡한 작곡자가 바로 홍난파(洪蘭坡)이다.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고 난파는 그의 호이다. 홍난파는 ‘고향의 봄’이라는 동요를 작곡해서 어린이들에게까지 가장 친근한 작곡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불행하게도 오랜 수를 누리지 못하고 44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짧은 생애 동안에 그는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기여한 바가 너무나 크다. 작곡가로서 바이올린 연주가로서 지휘자로서 교육자로서 음악평론가로서 또한 재주 있는 문필가로서 또한 순수음악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의 영역까지도 폭넓게 영향력을 발휘하여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있어서 주춧돌 역할을 한 선구자의 한사람이다.     

  1920년 4월 28일에 작곡된 ‘애수’야 말로 홍난파의 대표작이며, 어둡고 우울했던 일제 치하에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던 노래 ‘봉숭아’의 멜로디이다.

  홍난파 선생이 나라 잃은 슬픈 마음을 담아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작곡한 ‘애수’는 다음해인 1921년에 낸 홍난파의 첫번째 소설 창작집 『처녀혼』의 첫 장에 “서곡” ‘애수’ 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그 후‘봉숭아’의 노랫말이 지어져 발표된 것이 1925년의 일이다.

 당시 난파 선생의 벗으로 성악가이자 트럼펫 연주자이며 또한 정신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지내던 김형준 선생은 어느 달 밝은 밤,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아 집 뜰을 거닐다가 울밑에 다소곳이 피어 있는 봉숭아를 보게 되었다. 달빛 아래 피어 있는 봉숭아의 애처로운 모습이 꼭 나라를 잃고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모습처럼 여겨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선생은 곧장 서재로 들어와 ‘봉숭아’를 시로 지었다.

  시 ‘봉숭아’를 지은 김형준 선생은 이 작품을 홍난파에게 보여주었고 시를 읽은 홍난파는 “이 것이 내 바이올린 곡 ‘애수’ 와 아주 잘 맞겠어. 내가 이 시를 ‘애수’의 노랫말로 써야겠어” 이렇게 해서 바이올린 곡의 ‘애수’와 봉숭아의 시가 만나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 ‘봉숭아’가 탄생하게 되었다.

 


   2.  음악의 선구자 홍난파 선생

  주인 없는 초가집 울타리에 무심한 봉숭아는 애련하게 피어 있었다. 하얀 꽃, 붉은 꽃이 서리를 맞으며 늦가을 화단에 몇 송이가 달려 있고 오는 이 가는 이가 감회 깊게 바라본다.

 이것이 홍난파 선생의 생가 풍경이다. 조그마한 키로 쓸쓸히 잔명(殘命)을 이어가는 작은 몸매들이 노래 가사처럼 가련하다.

 수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직행버스로 남양까지 약 25분.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산 속 오솔길을 달려 야산을 지나 평원에 닿는다. 그가 죽은 후 45년만인 1986년 4월에야 원래 모습대로의 생가가 복원되었다. 방 두 칸 부엌 한 칸 의 초가집. 수수깡의 울타리와 싸리문, 낮은 담 위로 안방 문 앞에 걸린 초상화가 보인다. 집 밖 울타리와 둘레에 봉숭아가 둘러져 있다. 집 왼편 담 모퉁이에는 ‘난파 홍영후 선생이 태어난 곳’ 이란 유허비(遺墟碑)가 서 있다.

 홍난파는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홍준씨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우리나라 제1세대의 작곡가요 서양 음악의 개척자인 홍난파가 네 살까지 살던 집이다.

 이 마을엔 90여 호가 살고 있는데 그중 80여 호가 남양 홍씨(南陽洪氏) 홍난파의 문중 집안이다.

그 생가 옆집에 살고 있는 먼 친척인 홍봉선(洪鳳善)씨가 봉숭아를 심고 물을 주며 관리하고 있다. 예술가의 생가를 복원해서 보호하는 일은 국내 최초가 되는 의의 깊은 일이며 앞으로도 기대되는 일이다.

 그의 자취를 조금 더 볼 수 있는 곳은 수원 팔달공원 기슭에 세워진 노래비와 남양면사무소 내의 ‘난파회관’ 이다.

홍난파는 1898년 홍준의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가 네 살 때 가족들은 모두 그의 형을 위해 서울로 이주했다. 형 홍석우는 장안의 명사로 미국 유학에서 공부한 의학 박사. 세브란스 의전 학감이면서 YMCA 건물 내에 개인 병원을 개업했다. 그의 집은 예원여중 자리인 정동에 있었다. 옆집이 바로 영친왕(榮親王)인 이은(李垠) 공의 저택이었다.

 당시 그의 집안은 이미 기독교 가정으로서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되는데, 이는 어린 난파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한다. 

 난파는 어릴 때부터 집 근처인 이화학당에 들어가 놀면서 학생들의 음악 소리에 호기심 있게 귀를 기울이곤 했다. 이화학당에서 조금 내려가면 정동교회가 있어 남보다 쉽게 음악에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11세인 1909년 그는 YMCA 중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여기에서 정식으로 최초의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음악교육은 아주 초기 단계에 있었고 불과 서울 장안의 몇 개의 학교만이 창가의 과목을 신설하고 서구음계의 노래를 가르치고 있었으나 그런 교육기관도 불과 다섯 손가락을 꼽을 수 있는 그런 때였다. 다행하게도 당시 서울 장안에는 유일한 음악교사가 있었는데 그 분이 바로 김인식(金仁湜)이다. 그는 독학으로 성공한 김인식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이 때 벌써 그는 장난감 악기와 숫자보로  도래미파...... 음계를 해득했고 악보 읽기를 깨쳤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적인 암시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1911년 13세 때 우연히 바이올린과 바이올린 교습서를 7원 50전을 주고 산 일이다. 이 악기와 책이 너무 신기해 보여 밤새워 책을 보며 음률을 흉내냈다. 그의 흥미는 고조되어 이듬해에 음악 공부를 시작하고자 김인식 선생이 교사로 있는 조선정악전습소에 제1회로 입학하게 되었다. 김인식 선생은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어 선교사들이 그에게 음악을 특별히 가르쳐 주었고, 그들에게 배운 음악을 후배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 뒤 평양에서 서울로 이주해서 서울 장안의 최초의 음악교사가 되었다. 홍난파는 김인식 선생을 도와 1914년에 경성찬양대를 조직했고 그 해에 국내 초연으로 헨델의 할렐루야를 연주했다. 그는 이곳의 성악과와 기악과를 2년간 수업하고 바로 그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3년간 조선정악전습소에서 교편을 잡는 기간 동안에 그는 앞으로 그의 음악에 대한 집념을 쌓고 민족음악 수립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조선정악전습소는 조양구락부라는 신문화운동의 한 단체로서 출발해서 결국 조선정악전습소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조선악과와 서양악과가 공존하고 있어서 이 두 음악의 유기적 관계를 적립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었고, 난파가 뒤에 한국적인 소재를 그의 음악에 도입함으로 해서 창작생활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바이올린 연주 실력은 대단해 정악전습소 시절에 찬양대 대원으로 한해 동안 30여 회의 교회 순회 연주를 했다. 당시 서울 장안에는 바이올린이 단 두 대 뿐이었으니 그의 연주의 인기는 단연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도쿄 유학시절에도 그는 ‘폴란드 고아 구제음악회’에 수많은 음악도를 물리치고 출연해 독주를 하는 영광도 안았다. 3000여 명이 관람한 그 연주회로 그의 명성은 도쿄에도 삽시간에 퍼졌다.

 1924년에는 무선전화라고 당시에 불린 라디오 방송으로 최초의 바이올린 연주를 생방송으로 중계를 했고 1925년에 첫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다.

 난파는 1918년에 원대한 음악에의 뜻을 품고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났다. 당시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는 유학생 수는 불과 2, 3명에 그치고 난파보다 연상인 김영환이 관립학교인 우에노 음악 학교(현 동경 예대)의 피아노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밖에 성악의 한기주, 윤심덕등이 유학하고 있었다. 난파도 우에노 음악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도 그는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그러나 다음해에 3․1운동이 나자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로 결심하고 바이올린을 저당잡인 돈으로 유인물을 만들어 유학생들에게 배포하였고 뒤에 체포될까 두려워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때에 난파는 우에노 음악학교 예과를 마치고 본과에 들어간 뒤였다. 난파가 어떠한 교우관계와 과정을 거쳐서 유인물 살포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당시 동경에는 뜻 있는 많은 한국 청년들이 모여서 조국에 대한 걱정을 했고 이러한 생각은 독립운동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감수성이 예민하여 문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당연하게 생각되며, 그러한 면은 그 뒤 활동상황에도 여러 가지로 입증되어진다. 특히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광삼’이라는 예술잡지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 잡지는 문학 미술 음악 등을 다루는 종합 예술지로서 불과 3호라는 짧은 지령을 가진 잡지였으나 우리나라 신예술운동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그의 예술전반에 대한 폭넓은 식견이 쌓아졌고 그 뒤의 창작 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본서 돌아와 잠시 그는 방황하였다. 그는 1920년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복학을 하려 했으나 사상문제로 학교에서 거절당하고 귀국해 버렸다. 귀국 후 그는 주위의 권고로 연세전문과 세브란스의전에 적을 두기도 했으나 그가 가야할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고 음악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 해 12월 동경유학동창회가 주최한 베토벤 탄신 150주년 기념 음악회를 당시 종로 YMCA 회관에서 개최하였는데 피아노에 김영환, 바이올린에 홍난파, 소프라노에 한기주, 윤심덕, 바리톤 윤기성 등이 출연했고 한기주 김보라 등이 피아노 연탄을 연주해서 장안에 화제를 던졌던, 당시에 드물게 기록되는 아카데믹한 연주회였다고 한다. 이때에 난파는 출연 외에도 음악회 기획, 진행, 평론 등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 과도기에 난파는 신문기자 생활로 들어가 문학 쪽에 더 관심을 가지고 문학 창작과 번역 등 문필활동에 열성을 기울였다.

 이때의 창작집으로는 『처녀 혼』(1920. 3. 19) 『새벽종』(1921. 2. 6) 『비겁한 자』(1922. 2. 11) 『대회』(1922. 4. 2) 『최후의 악수』등이 발간되었다. 그 뒤 1930년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폭풍이 지난 뒤’라는 유고가 발견되어서 또 다른 그의 문학세계가 알려졌지만 어떻든 1920년대 초의 그의 문학작품은 문학사의 측면에서도 주목할만한 작품이었다.

 1922년에는 연악회를 조직해 실제로 음악활동에 나서게 되는데 후진을 양성하는 일, 그리고 각종 출판, 음악회의의 주선 등을 하였다. 이 기간동안 난파는 본격적인 바이올린 독주회(1925)를 갖게 되었고 ‘음악계’라는 잡지도 출간하게 되었다.

 당시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에는 “조선에서는 처음인 순전한 음악잡지일 뿐 아니라 신작, 악보, 논평 등 내용이 자못 풍부하더라” 고 평하였다고 하는데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이 잡지가 남아 있지를 않아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3.  전문 음악인으로서의 난파

 

  1926년 난파는 다시 청운의 뜻을 두고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는 우에노음악학교에 복학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일본 쿠니타치음악학교에 들어갔다. 이때에는 여러 명의 한국유학생들이 이곳에 다니고 있었으며 이곳에서도 그는 바이올린을 전공하면서 작곡에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다고 한다. 또 난파는 당시 일본에서 새로이 발족한 ‘신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 입단을 했고 이것 역시 한국인으로선 최초의 교향악단 주자인 것이다.

 이 사실은 지금도 NHK 교향악단으로 변한 신교향악단의 발전사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1929년 일본의 쿠니타치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보육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중앙보육학교에 와서 그가 최초로 펴낸 책은 ‘조선동요100곡집’ 이었다. 그 뒤 경성보육학교로 전근해서 ‘조선동요 100곡집’ 하편을 내놓아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 보급의 밑거름이 되었다.  

 서양음악을 이 땅에 보급하면서 그는 문학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앞서 말한 대로 단편집 『처녀 혼』을 출판하고 모파상의 단편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1931년 그는 세 번째 유학의 길을 떠났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셔우드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 공부를 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안기영 현제명 등이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늘 자기 발전에 부지런했던 난파는 그 해에 조선 음악가협회를 창설하고 전무이사로  취임하면서 악단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미국에 머물러 있는 기간은 2년이 채 안되었지만 여러 차례 연주회를 통하여 좋은 평을 받았다.   

  1933년 그는 귀국하여 그의 조카인 홍성유, 이영세 등과 함께 난파 트리오를 창단, 활발한 연주를 계속 하였고 바올리니스트로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으며 그 해에 현제명과 함께 창작 발표회도 가졌다. 이것이 난파의 본격적인 예술활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때에 이은상의 시에 의한 ‘나그네의 마음’을 작곡했는데 ‘성불사의 밤’ 등 13곡이 연곡으로 되어 있다. 특히 이 창작 발표에는 ‘방아찧는 노래’ 등 순 민요조의 합창곡도 포함되어 있어서 그가 미국생활에서 얻은 체험에서 민족혼이 담겨진 민속적인 음악을 만들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를 뒷받침이나 하듯 ‘금강에 살으리랏다’ 등에서도 순수한 5음음계를 사용한 것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1936년 난파는 당시 국내에서는 유일한 관현악단인 경성방송국(JODK)교향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하였으며 이 때부터 그는 성악곡 위주의 작품에서 바이올린 독주곡과 관현악곡 등으로 연주 작품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1939년 조선작곡발표 대음악제에서 난파는 관현악곡 ‘즉흥곡’과 ‘동양풍의 무곡’ 등을 발표하였고 작곡가로서 뿐만 아니라 민중음악에도 앞장서서 음악문화를 육성해 갔다는 점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그가 한 때 빅터레코드에서 일할 때 대중음악의 작곡과 편곡에도 손을 댔으며 백명곤의 코리아 재즈 밴드에서 연주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은 우리나라 대중음악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음악의 비교라는 그의 논문은 적어도 비교음악적인 면에서도 평가받을 만하다. 『음악 만필』 『세계의 악성』 등 그의 저서를 통해서 그가 하나의 음악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는 것은 새로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그가 친일파였다고 크게 떠들고 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지금까지 그의 행적만 봐도 그가 우리조국 민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그의 행적이나 음악을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으며, 혹 일제를 도운 일이 있었다 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를 우리는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미국 체류 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선생이 주도하던 흥사단(興士團)의 단가를 지었는데 후에 그것이 발각되어 종로 경찰서에서 험한 옥고를 치렀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병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던 난파는 고국의 광복과 구국의 일념을 그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서 반영한 애국자이기도 하며, 그의 노래 ‘봉숭아’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금지까지 되었던 노래로서 영원한 애국과 민족의 노래로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1941년 8월 31일 세상을 떠났으니 살아서는 광복을 보지 못하고 천국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4.  영원한 민족의 노래 봉숭아


  1920년에 발표한 그의 소설집 ‘처녀의 혼’ 첫머리에 ‘애수’라는 제목의 바이올린 곡으로 멜로디만 실려 있었고, 그 후 1925년에 발표된 ‘세계 명 가곡집’에는 봉숭아란 제목으로 노랫말과 함께 실려 있었다. 가락이 먼저 만들어지고 후에 가사를 붙인 이 곡은 서양의 단음계에(f단조) 바탕을 둔 애조 띤 선율과 민족의 설움을 담은 가사로 되어 있다.

 그러나 노랫말과 선율의 어울림 관계를 자세히 보면 악센트가 서로 잘 맞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악센트가 없는 음절에 높고 긴음이 사용되는 것은 선율이 먼저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곡은 8/9박자로 3박자 계통의 겹박자이며, 못갖춘마디로 형식은 작은세도막(a+b+c)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가사는 초장, 중장, 종장의 3장 6구 12절로 된 시조 형식으로 되어 있다. 리듬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리듬 패턴의 반복이지만, 곡이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선율의 아름다움과 꽉 짜여진 구성미 때문일 것이다.

  난파의 가곡이 오늘날까지도 널리 애창되는 이유는 아름다운 선율과 곡 자체에서 오는 감정이 우리의 민족적 정서와 상통한다는 점과 곡의 형식이 유절(有節) 형식으로 되어 있어 대중이 쉽게 부를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울 밑에 선 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1절은 그저 평화롭게 아름답게 꽃을 피운 봉숭아의 꽃과 잎을 따서 어여쁜 아가씨들의 손톱에 빨갛게 물들이고 노니는 성하(盛夏)의 애절함이라고 한다면,


     어언 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2절에서는 1절에서의 아가씨들의 사랑 속의 평화로움이 사라져 버리고 솔솔 부는 가을바람에도 상처를 받는 연약한 봉숭아를 우리 민족에 비유했고,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애절한 꽃망울에 대한 조사(弔詞)라고 할 것이다. 일본경찰은 “모질게도 침노하니”란 가사를 들어 금지곡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그러나 이 노래가 2절에서 끝이 났더라면 봉숭아도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심금을 울리지 못했을 거라고 김천애 교수는 말한다. 1절과 2절은 마지막 3절을 이끌어 내기 위한 서사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모질고 매서운 찬바람에 형태마저 사라져 버렸지만 그 혼백은 끝까지 남아 새봄에 다시 돋아나 주기를 바란다는 애절한 민족의 염원이 봉숭아를 단순한 애수 어린 가곡에서 민족의 노래로 승화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이라고 김천애 교수는 강조한다. 일본 경찰도 3절에서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의 가사에서 민족사상을 일깨운다 라는 이유로 이 노래부르기를 금지시켰으나 그럴수록 “봉숭아”는 민족의 노래로 더욱 널리 불리어졌다.    


          

   

   5.  김천애 교수와 봉숭아


   이렇게 만들어진 봉숭아를 제일 처음 불렀고 또 널리 퍼지게 한 공로자는 소프라노 김천애(金天愛1921년) 교수다. 김천애 교수는 “폐부를 찌르는 비원의 시구가 아니었더라면 봉숭아의 가락은 영원히 사장되었을지도 모르지요” 하면서 봉숭아의 가사를 짓게 된 시대적 배경을 설명했다. “김형준씨가 살던 집 울안에 봉숭아꽃이 가득했고 또 김형준씨는 생전에 홍난파와 이웃에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나봐요. 김형준씨는 봉숭아를 볼 때마다 우리의 신세가 저 봉숭아와 같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되기는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40년대의 일이다. 김천애 교수가 제일 처음 봉숭아를 무대에서 부른 것은 1942년 동경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직후 동경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렸던 신인음악회에서였다. 그때 일본 신문에서 조선의 소녀가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성악과를 대표하여 신인음악회에 출연한다는 기사를 내보내자 일본인은 물론 징용되어온 교포까지 구름같이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나라 잃은 백성이 호화스런 드레스를 어떻게 입을 수 있습니까?” 김교수는 연주복을 하얀 소복으로 입고 무대에 섰다고 한다. 공연이 끝나자 한국 교포들이 무대 뒤로 찾아와 격려해 주면서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하는 그의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김천애교수는 그해 가을에 귀국하여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YMCA회관, 교회 등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그때마다 하얀 소복차림으로 봉숭아를 불러 청중들의 가슴을 뜨겁게 감동시켰다. 특히 부민관에서 귀국독창회 때에는 앵콜송으로 봉숭아를 세 번이나 열창했다고 한다. 그 후 봉숭아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하여 봉숭아의 열풍이 일기 시작하자 일본 경찰당국은 나라 잃은 슬픔을 봉숭아에 비긴 이 노래의 가사를 문제삼아 금지곡으로 지정 발표했다. 그러나 김천애 교수는 무대에 설 때마다 기회있을 때마다 이 노래를 불렀고 그때마다 경찰에 연행되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이 시절에는 ‘봉숭아’ 하면 김천애요, 김천애 하면 ‘봉숭아’를 연상할 정도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되었다.

 내가 김천애 교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72년 5월 6일 자선을 위한 음악회에서였다. 당시 나는 다리를 다쳐 크러치에 몸을 의지하고 남성사중창 단원으로 무대에서 연주를 했고 김천애교수님은 자선음악회의 특별찬조출연자로 오셨다. 무대 뒤편에 서 계시던 교수님은 크러치를 의지하고 노래하는 나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한 순서가 끝나고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그리고는 내게 음악을 공부하라고 권하시며 교수님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내게 주셨다. 그 후 나는 서울 용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래쪽 청파동에 있는 교수님의 집을 방문하여 입시에 대하여 상담하였으며 교수님과 많은 이야기를 하게되었고 교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도움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3대 학장으로 취임하셨고, 그 다음해에 옛날 일본에서 유학시절에 신인음악회에 참석했던 교포들이 이제는 어엿한 사업가가 되어 옛날을 회상하며 봉숭아를 다시 들려달라고 간곡히 간청하여 1개월 예정으로 일본 대도시 순회연주를 떠났는데 2주가 되었을 때 친구로부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음악대학 학장직에서 해임됐다는 연락을 받고 남은 연주회를 포기하고 급히 귀국하여 보니  그 자리를 이 모씨가 차지하고 있었다고 교수님은 말끝을 흐리셨다. 이북에서 홀홀 단신으로 월남하여 선교사의 도움으로 유학까지는 마쳤지만 결혼도 못하고 지금까지 혼자 살아왔기에 누구에게 하소연할 사람도 없어 비참하게 물러선 이야기, 또 지금 살고있는 청파동 집은 고 이승만 대통령이 특별히 하사하신 집으로 넓은 정원에 큰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진 일본식 구조를 가진 큰집이었는데, 친구의 남편이 집을 담보로 은행에 대출을 하였고 그리고는 그 집이 은행으로 넘어가 이제는 곧 집을 비워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상의 야박한 인심에 분개했지만 그때의 나로서는 안타까움뿐이었다.

 교수님께 사사 받은지 겨우 3개월만에 교수님은 미국 LA에 있는 친구의 초청으로 이민을 가게 되셨고 나는 매우 섭섭했지만 언젠가는 만나뵐 수 있을 것을 기대하고 보내드려야 했다. 그 후 나는 목원대학교 음악교육과에 들어갔다.


     

   6.  봉숭아처럼 져버린 주인공


  1994년 7월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CLA)에 합창을 3학점 등록하고 바로 떠났다. 혹 김천애 교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을 기대하고 LA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에 살고있는 현지인(교포)에게 물었다. 그러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겨우 교수님의 집 전화번호를 알 수 있었다. 대학에서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공부하면서 매일 교수님댁에 몇 번씩 전화를 하였지만 통화를 한번도 하지  못하고 20여 일이 지나가 버리고 마지막 24일째 귀국하는 날 LA공항에서 마지막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교수님댁에 전화를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전화를 받으셔서 간신히 통화할 수 있었다. 교수님은 그동안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날 퇴원하여 오랜만에 외롭게 집에 돌아와 전화를 받게 된 것이었다. 매우 기쁘기도 하고 반가웠지만 비행기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하여 우리는 전화를 붙잡고 거의 40분을 이야기하였다. 교수님은 목소리는 떨렸고 흐느껴 우시는 소리마저 들려 와서 더욱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머나먼 이국 생활이 너무 외롭고 병까지 들어 의지할 곳도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고 하신다. 다음에 가족과 같이 교수님을 뵈러 오겠다고 약속을 드리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나의 마음은 매우 무거웠다. 교수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내가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고 교수님으로 인하여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로부터 1년쯤 지난 어느 날 조선일보에 ‘봉숭아의 주인공 김천애 별세’라는 기사를 보고 나는 죄책감과 슬픔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보통 우리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잘 기억하지만 연주하는 사람은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김천애 교수님은 ‘봉숭아’의 애절한 곡과 함께 영원히 우리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참고로 봉숭아는 순수한 우리의 말이고 봉선화(鳳仙花)는 한자어이기에 중등교과서에서는 봉숭아로 표기되어 있으며 본인도 순수한 우리 이름인 봉숭아로 표기했다.



7.  ‘음악만필’ 속에 수록된 광상소곡(狂想小曲)에서

                  

   (홍난파 선생이 펴낸 난파어록)

※ 신과 바이올린은 오랠수록 귀하다. 그러나 여자와 피아노는 새것일     수록 값이 나간다.


※ 연주가와 커피 맛은 남의 구설(口說)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것이     다.


※ 학문을 하는 사람은 자기 스승을 높이고, 음악을 배우는 청년은 자     기 선배를 욕하는 것에서부터 발족한다. 그러나 후자는 조선의 일     이다.


※ 누구나 축음기에 취입하는 현장을 목격(目擊)한다면, 그의 레코오드     를 살 현인이나 군자는 없을 것이다.


※ 자족(自足) 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진보가 없다. 대성한 예술가일수     록 겸양의 덕을 기르기에 힘쓴다.


※ 아무리 적은 소품에 설지라도 작곡가의 수법이나 특징이나 성격 까     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만이 결코 전적 가치(全的價値)는     되지 않을 것이다.    


※ 하이페츠는 말했다. 음악은 노작(勞作)이 아니라 천재이다. 그러나     음악은 천재가 아니라 노작이다.― 라고, 이 모순되는 두 마디 말은     모두가 진리인줄을 음악의 학도는 알아야 한다.


※ 음악가의 연주 기술보다는 청중의 감상력이 앞서 진보되는 것 같      다. 그러나 백의 구십구는 역시 귀보다도 입만의 진보에 그치고       마는 것 같다.


※ 서투른 독주자일수록 능란한 반주자를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연주     의 불 성공은 그 죄를 반주자에게 돌리려 한다.


※ 어떤 때에는 음악이 감정을 지배하는 일보다 감정이 음악을 지배      하는 수가 많다.


※ 재즈음악이란 결국 고전의 표절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 유행가 치고 들어서 구역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 까닭에      새 유행가가 속속 산출되는 것이다.


※ 음악가 치고 질투심이 없는 이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그네들의 신     경지를 개척하는 원동력이 되는 때가 많다.

   대수롭지 않은 것도 어려워 보일 때가 있고 평소에 난 곡이라고 생     각 되는 것도 제법 손이 도는 때가 있다. 이것은 확실한 기분이다.     그러나 일종의 못된 버릇이다.


※ 남의 연주를 들으면서 상을 찌푸리는 이가 있다 이것은 자신이 음     악을 잘 안다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는, 옆 사람의 불쾌와 증오를      살 따름이다. 


※ 길거리나 점두에서 소란스럽게 울려 나오는 레코오드의 규성(叫聲)     은 “내 소리판 한 장 사 주시오” 하고 부르짖는 애원성(哀願聲)이      아니고 무엇이랴.


※ 눈을 감고 경청하는 사람보다도, 연주 중에 옆의 사람과 담소를 하     던 이가 한결 더 연주자의 연기 평을 한다. 물론 담소는 귀로 하는     것이 아니지마는.


※ 음악의 역사를 증명함에 있어서, 과거의 악성(특히 낭만파)의 명곡     대작 중에는, 그네들의 연인의 잠재적 조력이 많음을 알 수 있다.


※ 기뻐서 웃는 자를 울리게 할 명곡이 없고, 슬퍼 우는 자에게 웃음     을 줄 명 연주가 없다.


※ 상궤(常軌)를 벗어난 행동이  범인에 있어서는 광대로 보이지마는,     천재에게는 더더욱 경의와 찬탄의 표적(標的)이 되는 것이다.


※ 사람은 선천적으로 ‘불치(不治)의 음악적’인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같이 ‘음악적’인 까닭에 보다 더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 비평이 없는 곳에 진보가 또한 없다. 그러나 서투른 망평(妄評)이야     말로 돋아나는 새 움을 해칠 염려가 많다.


※ 제금가(提琴家)는 자기가 양금가(洋琴家)되지 않음을 한(恨)하고, 양     금가는 성악가가 되었더면― 하고, 후회하는 때가 많다. 그러나 하     모니카 취주자도 달인(達人)의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다같이, 일생     을 두고 근주(勤做)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 ‘재즈’라고 덮어놓고 염가의 평을 내릴 것은 아니다. 고전에만 도취     된 이에게 ‘재즈’의 일 곡은 가끔 청량제가 될 때가 있을 것이다.


※ 조선에 태어났기 때문에 제법 음악가의 대접을 받는 줄을 모르고,     어떤 때는 자기가 좀더 음악국인  딴 나라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는 이가 있다. 조선을 음악국으로 만들 수 없다는 단언은 누     가 했는지 알고싶다.


※ 음악의 역사를 들추어본다면, 여자는 남의 음악을 소개(연주)하기       위하여서만 생겨난 것 같다.


※ 조선사람은 누구나 다 언필칭(言必稱) 비곡이다. 울기 위하여 음악     을 찾는 민족이 다른 데도 또 있을는지?


※ ‘무당’은 춤을 추고 ‘장님’은 북을 쳐야 한다. 꼭 같은 말이지만 말      (言)은 ‘앵무’가 잘하고 춤은 ‘두루미’가 잘한다.


※ 말(馬)처럼 기수(騎手)를 저울질하는 놈은 없다. 그러나 악기야말로     말(馬) 이상으로 주수(奏手)를 잘 알아보는 것이다.


※ 성년이 된 후에 비로소 음악을 배우려거든 성악을 시작하는 이만      같지 못하다.


※ 춤추는 지휘자는 반드시 명 지휘자는 아니겠지마는, 명가(名家)의      지휘는 대개 지휘 대상(臺上)의 독무(獨舞)와 같다.


※ 침묵은 은보다 낫다고 한다. 그러나 음악가의 침묵은 말 못하는 앵     무새와 같다.


※ 태반의 청중은 연주자의 성가(聲價)에 자기의 귀를 매수 당하는 것     이다.


※ 성악가 중에 음맹(音盲)이 많은 것은 경이의 현상이다.


※ 연주의 성적 여하는 청중의 다소에 정비례한다. 그러나 보다 더 청     중의 질에 관계된다.


※ 음악회장에 자주 출입하는 남녀 중에는 들으러 가는 이보다 보러      가는 이가 많음은 놀라운 사실이다.


※ 남성 악가(男性 樂家)의 잘못하는 것보다는 여성 악가(女性 樂家)의     잘못하는 것이 듣기에 더 흉하다.


※ 베토벤의 위대함도 명 연주자의 공로가 없이는 인정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의 배경 없는 예술은,     국경을 넘기에도 힘이 든다.


※ 음악이란 망월(望月)과 같다. 이것을 보고 슬퍼하는 자도 있지만 기     뻐하는 자도 있는 것이다.


※ 음악을 듣겠다는 준비가 없이 이것에 대할 때는 흔히 반대의 결과     를 얻을 수 있다.


※ 열정적 연주는 소극적 연주보다 청중의 마음을 끄는 힘이 크다. 그     러나 연주자의 자가 도취적 열연은 정당한 비평가에게 낙망 이외의     아무것도 주지를 못한다.


※ 현대인은 모든 현실에 있어서 음악을 이용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음악 자체를 놓고 생각한다면, 언제나 사람이 음악의 이용물이 되     는 것이다.                                 

출처 : 으막세임님
글쓴이 : 으막새임 원글보기
메모 : 울밑에선 봉숭아